
한 세기의 삶. 100년 가까이 사는 어른들이야 있지만,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처럼 한 세기를 ‘온전하게’ 영유한 이는 손에 꼽을 것이다. 말 그대로 ‘구구팔팔’, 백 세를 바라보면서 몸도 정신도 팔팔하다. 1920년생, 세는 나이로 아흔일곱인 김 명예교수는 요즘도 매일 산책과 하루걸러 수영하고, 책을 쓰고 강연을 다닌다. 강연을 가면 청소년기에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희끗희끗한 초로가 돼 인사를 한다. 한국 철학계의 1세대 교육자이자 수많은 젊은이의 멘토가 됐던 베스트셀러 수필가, 신학자나 목회자를 넘어서는 깊이를 가진 신앙인. 김 명예교수의 삶은 크게 세 측면에서 조명된다. 해방 후 기독교를 탄압한 북한 정권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월남한 그는 반(反)공산주의자가 됐지만, 정치적으로 ‘열린’ 보수로 평가받는다. 개신교 일각에선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볼 만큼 물신(物神)을 좇는 세속화된 교회에 쓴소리하는 종교적 진보주의자다.
그가 한 세기에 걸쳐 만난 사람들을 엮으면 우리 현대사가 된다. 수시로 오욕과 질곡이 교차했던 풍랑의 세월에서 김형석은 흔들림 없이 잔잔하고 올곧게 우리 사회에 맑은 물줄기를 대준 어른이다.
김 명예교수를 지난 12월 18일 그가 30년 넘게 몸담은 연세대 부근 카페에서 만났다. 쌀쌀한 날씨에 연세대 교정으로 모셔 사진촬영을 하느라 송구했으나, 꼿꼿한 걸음이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고, 사진기자의 이런저런 주문에도 내내 미소로 응해 주셨다.
―건강하고 편안해 보이십니다. 얼마 전 TV에 나오셔서 말씀하시는 거 보니, 수영도 계속하시고요.
“하루건너 한 번씩 가죠.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게 30분 될까. 운동이라기보다도 그저 내게 맞는 것 같아서. 이제 한 30년 넘었네요.”
―선생님께서는 뭐든 한 번 하시면 길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운동은 50대 중반쯤 건강에 마음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영을 해왔죠. 연세대에도 31년간 재직했고, 특수대학원 강의까지 치면 50년을 강단에 섰습니다. 교회 등에서 외부 강연도 수천 번을 이어가고 있죠.”
―요즘 일상은 어떠십니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산책도 하고 글도 쓰고 강연도 하고. 딴 생각할 틈이 없이 열심히 사는 것,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게 건강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선생님, 어릴 때는 병약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많이 나빴습니다. 한 이십 될 때까지 나는 항상 어느 정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살았어요. 사십 되니까 늦게까지 건강할 자신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요. 오십이 되니까 이제는 나도 남과 같단 말이지요. 그런데 칠십 되니까 남들보다 건강해졌어요. 젊어서 건강한 사람들도 보면, 내 몸이 건강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무리하다가 일찍 죽어요. 나처럼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오래 살아요. 백수(白壽)하신 한경직(1902∼2000) 목사님도 그런 글을 쓰신 적이 있어요. 나도 그편에 들죠.”
―선생님이 건강하게 되시고 오래 일하시는 데 신앙생활이 상당히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옛날 얘기인데 초등학교 졸업할 14세 때, 건강에도 자신 없고 집도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생각할 수 없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정월 초하룻날 밤에 꿈을 꿨는데, 내가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있다가 하늘을 올라가 버리더래요.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허약한 우리 집안 장손이 올해 죽으려나 보다, 하셨대요. 당시 교회는 조금씩 다녔죠.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한테 한 번 매달려봐야겠다. 그래서 철은 없지만 내 생애에서 기도다운 기도를 드리게 돼요. 하나님께서 나한테 건강을 주시면, 그 건강이 허락되는 동안 나를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할 테니까 나한테 건강을 주셔야겠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해 중학교에도 가고 서서히 건강이 좋아져서 뜀박질하다가 쓰러지는 일이 없어졌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기도를 한 게, 잠재적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내 인생의 목표가 뭔고 하니 삶이 끝날 때까지 일하는 것, 그렇게 됐죠.”
당시 기도를 통해 갖게 된 순명(順命)의 자세는 건강을 되찾은 것뿐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 듯하다. 그의 고향은 평양 만경대 부근 송산리(松山里)다. 평양은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곳이다. 송산리에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법 큰 장로교회가 있었다. 기독교를 떼어 놓고 그를 얘기할 순 없다.
―부모님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우리 아버님이 무엇이 계기가 돼서 크리스천이 됐는지 난 몰라요. 그런데 성경을 많이 읽은 분이에요. 시골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내용을 준비하면서 아버지한테 많이 물어보곤 했어요. 아버지는 열심히 교회를 나가지는 않으셨어요. 누구에게나 신앙을 권고하지도 않으셨어요. 집사도 아니고, 그런데 욕심을 내지도 않으셨어요. 그래서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신앙이 있나, 없나, 좀 의심했어요.”
부친은 어떻게 보면 ‘교회주의’보다 ‘성서주의’ 신앙인으로 볼 수 있다. 부친의 이런 신앙적 자세가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 장로교의 대표적인 명문인 숭실중학교를 다니셨습니다.
“당시로선 드물게 기숙사가 있어서 북간도의 용정을 비롯해 부산, 전남 등 전국에서 학생들이 왔어요. 나이는 세 살 많았지만, 시인 윤동주와 같은 반이었어요. 키가 커서 뒷자리에 있었어요. 장로교 계통의 미국 선교사가 교장이었던 시절이에요. 당연히 신사참배를 거부하니 총독부에서 학교 문을 닫으라 했어요. 그러니까 교장이 떠나야 했거든요. 우리는 신사참배를 하고 학교에 다니느냐, 거부하고 학교를 그만두느냐가 고민이었어요. 결국 윤동주는 용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나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어 휴학을 했어요. 1년이 지나 주변 어른들이 ‘강요당하는 참배가 신앙적으로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더 큰 목적을 위해 복학을 하라’고 타일러 복학을 했어요. 지금도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은, 처음 신사참배를 하는데, 당시 정두영 교장 선생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해요. 그걸 보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더 다져졌어요.”
―당시 평양에는 민족과 교회 지도자분도 여럿 계셨는데, 기억할 만한 일들이 있는지요.
“고당 조만식 선생님 강연도 듣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 설교도 듣곤 했어요. 송산리 바로 옆 대보산에 도산 선생의 산장이 있었어요. 그분이 서대문형무소에 있다가 건강이 악화하자 일제가 가석방을 해줬어요. 물론 사회활동을 하면 큰일 났죠. 그래도 이 어른이 우리 동네에 오셔서 우리 삼촌 집에서 하루 머무시며 동네 사람 20∼30명을 모아 놓고 강연을 하셨어요. 교회에서 설교도 하셨고요. 내 기억력이 가장 좋을 때여서 그 마지막 설교를 아직도 기억해요. 도산 선생은 애국심으로 가득한 분이에요. 그저 민족, 국가 걱정만 하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다시 감옥에 가셔서 그 이듬해 돌아가셨어요. 도산 선생의 마지막 강연, 설교를 내가 들은 셈이에요. 참 많이 배웠어요.”
―일본 유학을 가시게 됩니다. 신학을 택하지 않고 철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 한때는 목사, 신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와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철학을 봐서, 신학은 세계사 흐름에서 좁고 철학은 신학보다 더 먼저 있고 더 멀리 가는 큰 학문이라고 느꼈어요. 철학을 어느 정도 하고 신학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철학을 공부하니 신학으로 못 가게 됐어요. 예를 들면, 연세대 신학대학에 서남동(1918∼1984) 교수가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해 신학 교수가 됐거든요. 그분이 늦게 미국에 가서 신학을 다시 정리하려니, 거기 신학자들이 프로이트를 보거든요. 나중에 그분이 연대신문에 ‘내가 지금까지 신학 공부를 한 것이 모두 헛것이었다. 그저 성경만 읽고 인간을 몰랐다. 그래서 다시 출발해야겠다’고 고백을 했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나라 목사들, 신학자 중에 프로이트를 제대로 본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근래 스님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나오는데 목사나 신부가 쓴 책은 왜 없느냐고 해요.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은 교리만 얘기하고 스님은 인생을 얘기하니 그런 거예요. 예수는 무슨 얘기를 했는고 하니 교리 얘기는 안 하고 인생에 관해 얘기했어요. 그게 진리라고. 그랬으면 우리 목사·신부도 인생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좀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내가 아는 목사님들 가운데 동양에서 2500년 된 고전인 공자의 ‘논어’를 읽은 사람이 없어요. 그것은 정신적 지도자로서는 결격이거든요.”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들어가셨습니다.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조치대는 가톨릭 계통이었지만, 기독교 교육과는 상관이 없었죠.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이 후배였어요. 나는 사상적으로는 니체에서 키르케고르에의 길을 밟았지만, 그리스 정신에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는 길이었고, 무신론을 받아들여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일본은 기독교인 수가 적지만 신자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요.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이고 지성적이며 모범적인 인물이라는 대접을 받죠. 일본에선 500명만 모이면 큰 교회고 교회가 질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요. 여러 일본 교회를 다녀봤지만, 교회에서 십일조 헌금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된 것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같은 걸출한 개신교 사상가가 나왔기 때문이에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일본 지성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 인물이죠. 무교회주의자로 불린 그분의 강연 모임에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 등도 참여했어요.”
대학생활을 끝낼 무렵, 그는 강제징집당할 위기에 놓인다. 이를 거부하면 구속됐는데, 숭실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윤동주는 잡혀 감옥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김 명예교수는 극적인 행운으로 현해탄을 건너는 배편을 구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이번에는 공산 정권의 기독교 탄압에 봉착했다.
―선생님 자서전(‘나의 인생 나의 신앙’, 2004)에 짧게 언급됐습니다만, 북한 김일성과 동향(同鄕)이었고 만난 적도 있다고요.
“그게 이렇게 돼요. 만경대가 김일성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만경대 옆 동네가 우리 집 송산리, 거기서 6㎞쯤 떨어진 칠골이 김일성이 태어나 자란 곳이에요. 그때는 김성주였죠. 김일성 어머니(강반석)가 친가인 칠골에 와서 김일성을 낳거든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젖이 곪아서 못 먹였어요. 내 외할머니뻘 되는 분이 강 씨인데, 큰 외삼촌을 낳으려고 칠골에 왔다가 거기서 석 달 동안 김일성에게 젖을 먹였다고 해요. 나중에 그이의 아들이 공산당에 잡혀가니 ‘내가 김일성이를 석 달이나 젖 먹여 키웠는데, 우리 아들을 잡아갔다’고 한탄했어요. 연배가 여덟 살쯤 많아 본 적은 없지만, 김일성은 내가 다닌 창덕소학교를 먼저 다닌 선배예요. 열여섯 살쯤 만주로 갔다고 해요. 해방되고 그해 여름에 김일성이 만주에서 고향에 왔어요. 김일성의 할아버지가 ‘성주 너는 공부 많이 못 했지만, 형석 군은 일본 유학도 다녀오고 공부 많이 한 사람이다, 하고 저에게 소개도 했어요. 김일성의 조부모와 저의 삼촌, 사촌들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죠.”
―김일성과 대화도 나눠 보셨습니까.
“종전 뒤 고향에 온 김일성과 하루 오전을 함께 보냈어요. 김일성한테 해방돼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야겠느냐 물어보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첫째 친일파 숙청, 둘째는 토지 국유화, 셋째는 자본가를 다 추방하고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 것 등 여섯 개를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바로 알아봤죠. 그런데 그이가 평양으로 가고, 두세 달 후에 김일성 환영회가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렸어요. 동네 사람들이 갔다가 저녁에 오더니, ‘김일성이 누군가 했더니 칠골 살던 성주래. 성주가 김일성이야?’하며 모두 놀랐죠.”
현대사학계 일각에선 ‘가짜 김일성설’에 대해 학술 가치가 없다고 일축한다. 김 명예교수는 김성주가 김일성이 되는 경로와 역사의 아이러니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 당시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증축하고 중학교를 재건해 교장으로 있던 그는 점점 죄어 오는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결국 38선을 넘기로 한다. 가족과 헤어져 고초와 우여곡절 끝에 말 그대로 사선을 넘어 월남에 성공하고 가족과 재회한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 만든 중앙학교에서 교감을 지내시는 등 7년간 교편을 잡다 연세대에 발을 딛게 되십니다. 당시에 어떠셨나요.
“중앙중·고등학교에 한 7년 있으면서 학생들하고 참 정이 들었어요. 그때 고민한 게 교육자로 남느냐, 아니면 대학에서 학자가 되느냐였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대로 오게 됐어요. 당시에 중요한 결정을 했다고 보는데, 좀 과장해서 말하면 세 사람이 하는 일을 내가 혼자 담당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첫째는 철학 교수로서의 책임, 나한테는 소중했죠. 그다음, 연세대에 오기 전에 가르친 학생들이 ‘왜 우리를 버리고 가느냐’고 안타까워했어요. 대학에 와서도 키워야 할 어린애를 버리고 온 어머니 같았어요. 지금도 고교생을 위해 강연해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갑니다. 그것이 수필을 쓴 계기가 됐어요. 세 번째는 물론 종교생활이고요. 신앙운동, 종교운동은 제가 보기에 어느 목사 못지않게 열심히 했어요.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세 가지를 혼자서 다 한 셈이에요.”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잘해오셨는데, 선생님은 국민에게는 수필가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셋씩이나 했으니 하나도 성공한 게 없지요, 허허. 그래서 이다음에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 보는데 수필의 영향이 더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중앙학교 시절 제자들의 아쉬움을 달래 주려고 수필을 썼어요. 당시엔 우리나라에 수필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 피천득 서울대 교수가 ‘인연’이라는 책을 내면서 수필을 알렸지요. 그다음에는 수필다운 게 별로 없었는데, ‘고독이라는 병’을 처음 내고 ‘영혼과 사랑의 대화’가 나오니까 피천득 선생 다음에 많은 독자를 가진 사람은 내가 됐죠.”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수필집으로써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다.
―얼마나 팔렸을까요.
“내가 사회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그 책이에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박계주의 장편소설 ‘순애보’였는데, 여러 해 동안 6만 부였어요. 그런데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1년간 그보다 몇 배 나갔다고 해요. 처음으로 비소설 분야가 소설 분야보다 더 많이 판매된 책으로 기록됐지요. 이 책을 내게 된 일화가 있어요. 1년 동안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됐는데, 대학에서 본봉은 나오지만 수당은 안 나오거든요. 애들은 많고, 생활이 걱정돼 책을 내면서 출판사에 경제적 어려움이 오면 도와달라고 했어요, 갚아 주겠다고. 그런데 아내가 다른 얘기는 다 해도 돈 걱정은 안 하데요. 그런가 보다 하고 1년 뒤 돌아와서야 베스트셀러가 된 걸 알았지요.”
그의 책은 지금도 힘을 발휘한다. 지난해 10월에 낸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철학과현실사)가 반응이 좋고, 9월에 낸 ‘예수’(이와우)는 출판 불황기에 아주 이례적으로 1만 부 정도가 팔렸다. 종교 서적으로는 ‘대박’ 수준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진보-보수의 프레임에 갇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세계가 흘러온 것을 봤으면 좋겠어요. 20세기 전반까지는 세계 역사가 좌우로 갈려서 적대적인 사고방식 하나만 있었어요. 이제는 열린 가치관, 다원적 가치관으로 바뀌었어요. 철학도 절대적인 가치관에서 상대적인 가치관으로 넘어왔어요. 미국이 왜 강한 나라가 됐는가, 공화당이 더 열린 사회로 가느냐, 민주당이 더 열린 사회로 가느냐로 경쟁하기 때문이에요. 어느 나라보다 앞서 다원사회로 갔어요. 폐쇄사회로 가는 것은 희망이 없어요. 우리나라의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주의적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한 진보예요.”
―폐쇄적 진보란 말씀이군요.
“폐쇄적 진보는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건강한 보수가 앞으로 몇 년간은 더 필요해요. 열린 보수가 앞으로 나타나서 우리 사회를 다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우리가 거기에 힘을 모아줘야 해요. 젊은 사람들은 보수를 싫어하지만 열린 보수라면 이 문제는 해결돼요.”
―보수도 너무 기득권만 지키고 부패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열린 사회로 가기 위해 보수가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요.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텐데요. 우리가 힘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나 법이 지배하는 사회까지는 올라왔어요. 그런데 지금 정치를 보면 다시 내려오려고 해요. 제일 나쁜 게 정치 지도자들이 법에만 걸리지 않으면 나는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바로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예요. 질서란 말에는 포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질서가 지배하는 것은 선한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예요. 질서사회는 윤리와 도덕과 교육이 군림하는 사회예요. 여기로 올라가야 하는데 못 가고 있어요. 보수가 이런 지향점을 명확히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열린 보수가 되는 길이에요. 그 바탕이 되는 사람들의 변화는 정치가보다 교육자, 종교지도자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교육자를 말씀하셨지만, 교육의 위기라고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노무현정권 때 교육정책에 영향을 끼친 한 원로교수가 세미나에서 교육정책을 얘기하면서, 우리나라도 중·고등학교가 평준화됐으니 이제 국립대가 평준화되면 된다고 해요. 서울대 평준화하고 사립대 평준화까지 가면 성공한다고 하대요.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정의를 평준화를 위한 수단으로만 봐요. 아주 위험한 생각이에요. 대학들도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해야 해요. 또 하나 우리 교육에서 제대로 된 책 읽기가 부활해야 합니다. 학생 때 고전을 읽혀야 해요. 그게 첫 번째예요. 지난 1세기 동안 독서를 가장 많이 한 나라들만 성공했어요.”
―우리 개신교가 교회 대형화와 목회세습, 세속화로 어느 때보다 욕을 먹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너무 폐쇄돼 있다, 좁아졌다, 그런 생각을 해요. 인류에 기독교가 더 공헌했느냐, 아니면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휴머니즘이 했느냐. 인문학이 더 했거든요. 교회가 교회주의에 빠져서 교권과 교회권만 있지 교리보다 중요한 인생의 진리는 외면했어요. 하나님만 찾다가 인간이 없어지면 그 종교는 필요가 없잖아요. 한국 교회는 이제 병들었어요. 헌금 안 하고 교회에 안 나와도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은 죄인입니다, 그렇게 설교했으면 우리 사회악이 많이 줄지 않았을까요.”
인터뷰 = 엄주엽 문화부장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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