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새해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해넘이를 즐기고 해돋이를 보러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새해엔 뭔가 바뀌지 않을까, 새로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언론 또한 귀한 지면을 할애해 새해에 바뀌는 것에 대한 소개를 빼먹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기대는 부질 없이 끝나곤 했다. 2016 병신년(丙申年)도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벌써 닷새째, 세상은 여전히 진부(陳腐)하다. 대통령과 장관, 각계각층 지도자들의 신년사가 나오고 김정은도 한껏 할아버지 흉내를 내며 신년사를 읽었지만, 그다지 새로운 게 없었다. 2016년 새해란 사실만 빼고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국회는 선거구 무효라는 초유의 사태를 막지 못한 채 공멸(共滅) 모드에 잠겨 있고, 새해 첫 아기의 울음소리도 저출산 위기 해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새롭지 않은 진부한 새해가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
새해에도 한국 사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변화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또 한 해 지겹게 더위와 가뭄, 추위와 절망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부한 새해가 되풀이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의 문화 생태계가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의제가 바로 공정성(fairness) 문제다. 갑(甲)질 논란, 금수저·흙수저론, 고위공직자들의 특권·특혜 시비 등은 최근 들어 부쩍 더 빈번히 언론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키워드들이다. 패션이나 신상품, 유행보다 더 의미심장(意味深長)하게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트렌드를 표상해 주는 이슈들이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한때 정치권을 휘저었던 경제민주화, 동반성장이란 화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고, 앞으로 언제라도 다시 재연될 개연성이 크다. 아직 창당도 안 한 ‘안철수 신당’이 호남에서 ‘더민주’ 당을 앞서는 지지를 얻으며 ‘공정 성장’을 표방한 것, 새누리당이 공천 룰 문제로 내홍을 겪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영화 ‘베테랑’과 ‘내부자들’이 대중의 호응을 받는 이유는 뭘까. 왜 마이클 샌델의 ‘정의(Justice)’는 유독 한국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샌델이 강의에서 사용한 소크라테스식 산파술 덕분일까. 아니면, 돌연 창업주와 사장 간의 갈등을 통해 민낯을 드러낸 출판사의 기막힌 마케팅 덕분이었을까. 땅콩 회항 사건에서 몽고간장 명예회장 사건, 급기야는 최근 최태원 회장의 ‘외도 고백’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스캔들 퍼레이드를 대중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공정성 문제! 달리 말하면, 모든 불공정과 특권·특혜를 배격하는 정치 사회적·문화적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의 근본 리스크가 무엇인지, 가장 핵심적인 현안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시대 정신이자 역사적 운동 에너지다. 끊임없이 축적되고 임계점을 넘나들며 언제라도 폭발할 듯 들끓는, 그러다 무시로 분출하는 엄청난 에너지다. 사람들은 이제 더는 정치인, 고위공직자, 재벌, 종교인, 사회 명사들이 벌이는 불공정 게임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판하고 조롱하며 반발과 항의를 주저하지 않는다. 과거엔 표출 방법을 몰랐거나 조직화할 줄 몰랐다면, 이젠 훨씬 더 다양하고 용의주도하게 반발의 에너지를 폭발시켜 세상을 바꾸려 들 것이다.
샌델의 ‘정의’가 한국에서 최고 인기를 누린 것은 산파술이나 마케팅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불공정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부끄러운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에너지가 강하고 풍부한 나라라는 역설도 성립한다. 이 엄청난 에너지, 정의에 대한 열망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도록 할 수는 없을까. 몰락의 덫이 될 수도 있지만, 반전(反轉) 대혁신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 그리고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과 ‘너트크래킹’ 와중에 재도약의 기회를 모색하는 기업들이 새해에 더욱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그냥 그대로 하던 대로만 하면, 변화도 새로움도 꿈도 생기지 않는다. 항상 놓치는 교훈은 실은 단순하다. 새해에 대한 기대는 굳은 의지로 실천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새해에는 나아지겠지, 뭔가 달라지겠지 기대하고는 역시 마찬가지였구나 하고 개탄하는, 기대와 실망의 진부한 되풀이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변화를 위해 도전하는 의지와 실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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