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중구 신포로에 있는 인천개항박물관(사진 왼쪽)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석조건물로, 당시 조계(租界)에 자리 잡은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이었다. 1880년대 후반에 문을 연 인천의 유일한 금융기관이며, 개항 당시 우리나라에 대한 금융침투의 첨병이었다. 국내 금융기관 최초의 지점은행이었던 대한천일은행으로 유입되는 자금줄을 끊기 위한 작업도 여기서 진행됐다. 소설 ‘뱅크’의 중심배경이며 지금은 개항박물관으로 활용된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인천 중구 신포로에 있는 인천개항박물관(사진 왼쪽)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석조건물로, 당시 조계(租界)에 자리 잡은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이었다. 1880년대 후반에 문을 연 인천의 유일한 금융기관이며, 개항 당시 우리나라에 대한 금융침투의 첨병이었다. 국내 금융기관 최초의 지점은행이었던 대한천일은행으로 유입되는 자금줄을 끊기 위한 작업도 여기서 진행됐다. 소설 ‘뱅크’의 중심배경이며 지금은 개항박물관으로 활용된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21) 김탁환의 소설‘뱅크’ 배경 인천개항장문화지구

철호와 진태는 청국 조계와 일본 조계를 가르는 계단에 나란히 앉아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봄날의 아침 햇살이 두 청년의 뺨을 더욱 싱싱하고 붉게 했다. 만조까진 여섯 시간쯤 남았다. 그 사이에도 지게를 고치고 석대를 점검해야 하지만 오늘 그들은 특별 외출을 허락받았다. 신임부사 외동딸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온 것이다. -‘뱅크’ 1권, 155쪽.

‘뱅크’의 ‘제2부 바야흐로 인천시대’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대목이다. 중인인 장철호와 천민인 박진태가 청국 조계(租界)와 일본 조계의 경계인 계단에 앉아 양반댁 규수 최인향을 기다리고 있다. 신분을 뛰어넘어 근대인의 사랑을 그리기엔 이곳 인천 조계가 안성맞춤이었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간이 있다. 혼란기나 격변기 혹은 과도기라 불리는 시절이다. 망국과 건국 그리고 전쟁의 아수라장은 누구에겐 위기지만 누구에겐 기회인 것이다. 용감한 이는 더 용감하고 비겁한 이는 더 비겁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특별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또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공간이 있다. 인종, 국적, 직업이 제각각인 이들이 만나고 사귀고 다투고 헤어지는 곳.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때일수록 공간의 편차는 컸다.


개화기 인천은 이 둘을 아우른다. 중세 질서가 무너지던 시절, 개항과 함께 이 서해 항구로 외국 문물이 밀물지어 온 것이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먼저, 도읍지인 한양보다도 먼저 근대 질서가 시작된 곳이 바로 19세기 말 인천이었다.

‘뱅크’를 쓰기 위해 개화기를 다룬 소설과 영화를 두루 살폈다.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제국주의와 맞선 민중의 투쟁을 동학에 방점을 찍어 이야기로 펼치는 것이고, 둘째는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워 정쟁과 궁중 암투에 집중하는 것이며, 셋째는 근대 문물과 직업을 조망하여 새로운 문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뱅크’를 통해 네 번째 흐름을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경제와 사회제도의 측면에서 그려보는 작업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은행과 회사였고, 그 둘이 함께 시작된 곳이 바로 인천 조계였다.

‘뱅크’를 구상하고 문화일보에 연재하는 동안 백 번도 넘게 인천을 오갔다. 개화기 문화재가 밀집된 인천 중구 개항장문화지구는 답사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었다. 매립지가 늘어 해안선이 멀어졌고 각국 조계에 건물이 많이 들어섰지만, 일본 조계와 청국 조계의 윤곽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답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길이다. 길이 지워지거나 변형되지 않았다면, 그 길을 따라 부서지거나 증축된 건물의 원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인천부사(仁川府史)’와 ‘인천사정(仁川事情)’을 꺼내 지도와 기록을 확인하며 걸었다. 어떤 날은 말 한마디 않고 혼자 종일 쏘다녔고, 어떤 날은 우연히 어울린 관광객들에게 문화해설사처럼 조계의 특징을 설명한 적도 있었다.

오래 계속 반복해서 가니, 조계의 옛 모습이 점점 분명하고 다채롭게 다가왔다. 사계절 풍광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골목 하나, 건물 하나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최초의 근대 노동자인 부두 노동자들이 배에서 상품을 내려 옮기던 바닷가에서부터 짜장면을 만드는 청국 조계의 음식점, 성경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던 성당과 교회, 외국어를 비롯한 신식 교육을 받던 학교, 주린 배를 자극하는 냄새를 풍기던 제과점, 탁주와 청주에 위스키와 와인이 곁들여지던 주점이 그곳에 있었다. 조선 팔도에는 전혀 없는 가게와 상품들이 거리마다 다닥다닥 붙어 낯선 기운을 뿜어냈다.

특히 매혹적인 시간은 밤이었다. 개화기 이전 조선인들은 일찍 저녁을 먹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인천 조계의 밤은 휴식과 고요에 잠긴 어둠과는 거리가 멀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까진, 인천으로 들어온 외국인들은 누구나 조계의 호텔에 머물렀고 인천의 밤을 경험했다. 내가 답사를 갈 때마다, 안내판 외엔 흔적도 없는 대불호텔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도 이 매혹을 더듬기 위해서였다.



해안의 볼품없는 초가에서부터 어둠이 깃들었다. 행인이 줄고 상점마저 문을 닫은 후에도 조계의 호텔은 수십 개 홍등을 밝혔다. 청국 조계 스튜어트 호텔과 일본 조계 대불 호텔 그리고 각국 조계 코리아 호텔은 삼성(參星)처럼 인천의 밤을 수놓았다. 부두에 배가 들어온 날에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호텔 전쟁이 따로 없었다. -‘뱅크’ 1권, 175쪽.



외국인과 외국 상품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각종 제도가 함께 들어와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 특히 일본은 제1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을 차례차례 일본 조계 번화가에 나란히 입성시켰다. 맞은편에는 전당포들이 따라 들어왔다. 일본의 금융자본에 맞설 조선의 은행은 아직 없었다.

이 낯선 풍경은 조선에 새로운 빛이자 더 깊은 어둠이었다. 게임에 능한 프로 선수와 처음 게임을 접한 아마추어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무역과 은행과 주식회사에 익숙한 열강들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시스템에 편입시키면서 가장 불리하고 가난한 자리로 내몰았다. 공정하게 똑같은 출발선에서 겨룰 기회는 사라졌다.

‘뱅크’에서 내가 담고 싶었던 것은 갑자기 근대로 편입된 세 젊은이의 좌충우돌 고생담이다. 송도 상인 장철호와 제물포 천민 박진태가 은행가가 되기까지, 고관대작의 딸 최인향이 주식회사 사장이 되기까지 얼마나 높고 험한 장벽들이 조선 최초로 그들 앞에 놓였을까. 세 주인공처럼 출세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으며, 그들이 맛본 것은 돈의 냉혹함이었다. 회사와 은행과 전당포를 도는 동안, 그나마 가지고 있던 밑천마저 수중에서 사라졌다. 돈 때문에 죽고 죽이는 범죄가 조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전당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듯한 세 개의 은행이 그나마 합리적으로 조선인들과 거래하는 기관이라면, 맞은편에 자리 잡은 전당포들은 은행에 진 빚을 갚지 못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매달리는 죽음의 문턱이었다. 일찍이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그린, 피도 눈물도 없는 전당포가 인천 조계에서 활발하게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조선인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빠르게 근대 경제의 본질을 깨달아갔다.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은 외국 금융자본에 맞서 민족자본을 지키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대한천일은행 지점이 개성과 인천에 문을 열었다. 일본은행들이 독주하던 인천에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이 대항마로 등장한 것이다. 민족은행과 민족회사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은행과 회사를 경험해온 장철호, 박진태, 최인향이 달라진 국면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당연했다.

2016년 1월, 매운바람이 몰아치는 조계를 다시 걷는다.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청국 조계에선 지금도 중국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스튜어트 호텔 자리엔 중화요리점이 들어섰다. 계단을 건너 조금만 걸어가면, 일본영사관 터를 대부분 차지한 인천 중구청이 보인다. 거기까지 이어진 거리엔 1층이 가게고 2층이 가정집인 일본식 주상복합 목조건물이 늘어서 있다. 그 아래 번화가엔 석조로 지은 일본은행 건물 세 개가 자리를 잡았다. 은행거리로 불리는 이유다. 다음 거리로 더 내려오면, 부두 창고들이 코끼리 같은 덩치를 자랑하며 나란히 있다. 지금은 예술가들이 머물며 작업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2011년 가을과 겨울, 나는 인천문화재단의 호의로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 인천지점이었던 건물의 작은 방에서 소설을 썼다. 이 건물은 조계에 남아 있는 건물 중에도 오래된 축에 속했다. 솔직히 그 방에서 많은 문장을 쓰진 못했다. 언 손을 히터에 녹이며 자판을 두드리기보단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벽을 손바닥으로 쓸거나 창가에서 추운 거리를 내다본 시간이 곱절은 많았다. 내게는 강력한 이야기보다 두꺼운 건물 안에서 우두커니 창밖을 쳐다보던 겨울 오후의 나른함이 더 필요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개화기의 풍속일 수도 있고, 조계에 사는 이들의 단단한 일상일 수도 있었다.

해가 지면 조계의 여러 카페에 웅크리고 앉아 글을 썼다. 조계에서 건진 느낌과 생각은 서울로 가져가지 않고 인천에서 문장으로 옮긴다는 것이 내가 정한 원칙이었다. 1899년 경인선 철도를 타고 한양에 내리자마자 인천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몽땅 까먹었노라고 하던 선교사들의 농담이 이와 비슷할까. 마음이 급했다. 빵과 커피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대불 호텔 앞이나 계단 중간 혹은 부두 창고 뒤 작은 카페에서 문장을 채우다 보면 서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마지막 전철을 놓치고 영국영사관 자리를 차지한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유숙한 적도 있었다.

앞으로도 자주 인천을 오가려 한다. ‘뱅크’는 은행을 중심으로 장편소설을 만들었지만, 인천엔 소설이나 영화로 옮길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앞으로도 인천에 젖줄을 대고 적어도 두 작품 이상은 새로운 이야기를 뽑아낼 계획이다. 특히 화수분처럼 이야기가 샘솟는 인천 조계는 내게 고마운 공간이면서 부담스러운 장소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눠, 처음 근대를 접한 이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뜨거운 열망과 참혹한 절망까지 그려보고 싶다. 이러한 시도는 복고풍 회상이 아니라 지금 어려움에 처한 우리의 모습을 되짚어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뱅크’의 세 주인공을 나보다 딱 백 년 먼저 태어나서 인천을 활보하도록, 좌절하고 좌절하고 좌절해도 다시 일어서도록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아니 우리도 그들처럼!

소설가 김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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