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훈정 / 서울대 교수·식품영양학

많은 이들이 새로 시작하는 설렘으로 맞은 새해지만, 굳이 계속되는 날짜의 연속들일 뿐인데 왜 달력을 바꾸는지, 왜 흩어졌던 가족과 친지들이 같은 날짜에 모여들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그중 한 사람인데, 달력을 바꿀 때마다 늘어가는 나이가 부담스러워지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다. 그리고 명절과 휴일에 반드시 따라오는 음식 준비와 가사 노동에 대한 부담감도 또 다른 이유다.

앞의 이유야 달력과는 관계없이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그저 투정일 수밖에 없고, 뒤의 이유는 이미 주부들이 공감하고 있어 ‘명절증후군’이라는 용어까지 생겼기 때문에 자세히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한 번 접근해 보려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IT산업과 관련 전자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 하지만 IT의 발전이 주부들의 노동 강도나 노동 시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미해 보인다. 이 기간에 가장 발전한 기기는 누구나 이견 없이 스마트폰을 꼽을 것이고, 그 밖에 눈에 띄는 변화는 평면 TV와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 정도일 것이다.

물론 다양한 전문 기기의 발전이 있었겠으나, 소비자가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들여다보면 이들의 발전은 엔터테인먼트나 여가 생활에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얼마나 편리하게 해주는지는 의문이다. 필자가 꼽을 수 있는 유일한 일상생활 도우미 IT 기기는 자동차 내비게이션뿐이다.

또 하나, 기기는 아니지만 서울시 교통정보 시스템과 환승 시스템은 진정한 정보산업의 개가로 생각된다. 그 외 의식주와 관련해 정보산업과 접목된 것은 보안 시스템이나 원격 보일러 시동 정도, 의류산업 쪽에서는 웨어러블 기기들의 개발에 많은 투자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 개발된 웨어러블은 의류라기보다는 액세서리가 주류를 이룬다. 가전제품 판매 사이트에 들어가면 10년 전과 비교해 획기적으로 바뀐 상품이 눈에 띄지 않는다. 로봇 청소기가 주부 노동 해소에 가장 근접한 제품이랄까? 음식과 관련된 제품에는 더더욱 획기적인 변화를 찾을 수 없다.

언젠가 인터넷과 연결된 냉장고를 본 적이 있는데, 시장에서 사라진 것을 보니 별 호응을 얻지는 못한 듯싶다. IT 강국인 우리나라가 이러할진대 외국의 경우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외국의 미래 주방 모습을 예견한 글들을 보면 수십 년간 자동화와 로봇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삽화 디자인이 조금 현대화됐을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중에서 한 가지 새롭게 등장한 아이템이 3D 프린터다. 피자나 초콜릿 같은 음식을 인쇄하는 3D 프린터들도 속속 개발되고 있는데, 3D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는 다른 제품들과 달리 음식의 경우 그 재료(인쇄 원료)의 보관이 상용화의 관건이라 본다. 이 때문에 아직 3D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는 음식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원료별로 냉장, 냉동, 건조, 암소 보관 등 다양한 보관 조건이 음식의 맛과 안전 확보를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조건에서 보관된 재료를 모아 인쇄(조리)를 해내야 하는데, 복잡한 음식을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컴퓨터로 프린터 조작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물론 일부 음식은 불완전하나마 현재도 시연이 가능했고, 불가능이란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조리된 음식도 3D 프린터로 만들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믿기는 하지만, 아마 명절 음식을 만들어내는 프린터는 다른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프린터가 나온 뒤 가장 늦게 나오는 제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 프린터의 형태로 그대로 발전할지, 아니면 현재 조리기구의 조합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기기가 있다면 주부의 음식 준비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지 않겠는가. 기기가 개발된다면 우리는 주방에서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게 되지 않을까? 일단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에서 그날 또는 일주일 동안의 메뉴를 결정한다. 이때 데이터베이스에는 영양 정보도 포함돼 있어 각자의 기호는 물론 건강 상태까지도 맞춰 식단과 식재료를 고를 수 있다. 선택된 식단에 따라 쇼핑 목록이 출력되면, 이를 토대로 자동화 기기용 재료를 구입한다. 각종 재료는 판매 시점부터 조리 전 상태로 씻고, 잘려 1회 분량씩 포장돼 판매된다.

포장에는 재료 내용뿐만 아니라 저장 조건과 유통기한이 포함된 코드가 표기되어 있어, 냉장고(저장고)는 이를 읽어 적당한 칸에 넣도록 하고 제품에 알맞은 조건으로 각 칸의 온도와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한다. 계획과 달리 사용되지 않고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는 냉장고가 폐기해 주는 것은 물론이다. 컴퓨터에서 오늘 저녁 메뉴를 결정해 자동 조리 시스템에 통보하면, 저장되어 있던 위치에서 냉장고가 재료를 차례차례 꺼내 세척대를 거쳐 조리대로 이송하여 순서대로 재료를 더해 가면서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레시피대로 온도와 시간 방법을 맞추어 조리를 한다. 기본 레시피 데이터베이스에 개인적인 취향을 가감하려면 컴퓨터만 조작하면 끝난다. 이런 조리 시스템이 있다면, 퇴근하기 전에 원격으로 컴퓨터에 입력하는 단순한 동작만으로 미리 조리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2009년 통계청에서 조사한 우리나라 여성의 하루 평균 음식 준비에 사용하는 시간은 1시간 40분이었다. 미래형 주방에서는 아마도 30분 이내로 줄어들 것이다. 명절증후군을 없애기 위해서는 명절 음식 데이터베이스만 갖추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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