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 한국외국어대 교수·법학

노동개혁이 사실상 좌초될 위기에 직면했다. 한국노총이 11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9·15 대타협’ 파탄을 선언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말에 정부가 내놓은 통상해고와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에 대한 행정지침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한노총은 정부가 1주일 내에 5대 노동 입법과 양대 지침을 모두 원점으로 돌리지 않으면 노사정 탈퇴와 투쟁을 불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가 이를 철회할 의사는 전혀 없어 보인다. 결국 이는 한노총의 면피를 위한 명분 쌓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정부와 노동계의 균열은 4개월 전 대타협 발표 때부터 그 조짐이 보였다. 당시의 노사정 합의문을 보면 통상해고 기준이나 취업규칙 변경 요건과 같은 예민한 사안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 과제로 남겨둔 채 ‘노사가 충분한 협의를 거친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봉합해 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노사정 모두에 책임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한노총의 행태는 너무나 무책임하다. 한노총이 우리나라 노동계를 대표하는 단체라면 적어도 왜 노사정에서 탈퇴하는지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할 의무가 있다. 단순히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는 것을 빌미로 합의를 파기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칫 집단 이기주의로 비칠 수도 있다.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공을 들여온 고용 입법이 사실상 어렵게 되자 지난 연말에 전문가 간담회를 거쳐 통상해고 지침과 취업규칙 변경을 내용으로 하는 지침을 내놓았다. 그 내용을 보면 기존의 판례를 정리한 수준이다. 해고 기준을 명확하게 하고 정년 연장에 따른 임금 제도 개편을 골자로 하고 있다. 노동 5법이 입법부 벽에 부닥친 상황에서 고육책으로 나온 것이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내용으로 돼 있다. 이를 두고 노동계에서는 ‘쉬운 해고’라고 비판하지만, 그 내용을 꼼꼼히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근로자들을 해고로부터 보호하는 내용이 훨씬 많다. 노동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부가 제시한 지침에 따르면 해고하기가 사실상 더 어렵게 될지 모른다는 의견이 나온다. 물론 노동계가 우려하는 바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옳다.

이번에 노동개혁이 무산된다면 국회와 정부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국회는 식물국회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노동개혁을 정략적으로 이용만 하지 말고 진정성을 가지고 노동 입법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총선 일정을 고려하면 그다지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이상 총선을 의식한 정치적 퍼포먼스에 그쳐선 안 된다. 아울러 정부는 더 이상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말고 기존의 내용을 보다 치밀하게 수정·보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북한의 핵실험과 중국의 증시 폭락 같은 악재가 겹치면서 우리 경제의 앞날이 한층 불투명하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청년실업률은 9.2%로 사상 최악의 상태다. 여기에 4월 총선까지 맞물리면서 나라 전체가 거대한 미로로 빨려드는 것 같다. 이처럼 나라가 어수선할 때일수록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지난해 어렵게 마련한 노사정 대타협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노사정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리고 각자 초심으로 돌아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낙담해 있는 비정규직과 청년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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