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년 메리 여왕이 시중을 드는 피에르 차스터라드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골프를 치며 다정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피에르는 프랑스에서부터 메리 여왕을 보필했으나, 여왕의 침실로 침입하는 등 여왕을 짝사랑하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상상 속의 이 그림은 1905년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린 삽화로 현재 스코틀랜드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1560년 메리 여왕이 시중을 드는 피에르 차스터라드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골프를 치며 다정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피에르는 프랑스에서부터 메리 여왕을 보필했으나, 여왕의 침실로 침입하는 등 여왕을 짝사랑하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상상 속의 이 그림은 1905년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린 삽화로 현재 스코틀랜드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최초의 여성골퍼’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메리 여왕의 유품들이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에 보관돼 있다. 이 유품실에는 메리 여왕이 정부와 짜고 남편을 살해한 사실 등이 기록돼 있다.
메리 여왕의 유품들이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에 보관돼 있다. 이 유품실에는 메리 여왕이 정부와 짜고 남편을 살해한 사실 등이 기록돼 있다.
스코틀랜드의 퀸 메리는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살다가 가장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여왕이었다. 1542년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5세는 삼촌뻘인 잉글랜드의 헨리 8세로부터 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신교를 채택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이에 불복해 2만 병력을 이끌고 출격했다가 2주 만에 열사병에 걸려 30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사망하기 6일 전 왕비는 유일한 혈육인 공주를 출산했다. 내심 아들을 바랐던 제임스 5세는 “공주를 얻었지만 스튜어트 왕조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부친이 사망하면서 메리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스코틀랜드 최초의 여왕이 된다. 선대 왕들처럼 메리 여왕도 거의 매일같이 골프를 즐겼다. 메리 여왕은 공식적인 문헌에 ‘역사상 골프를 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돼 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에 전시된 메리 여왕의 초상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에 전시된 메리 여왕의 초상화.
메리 여왕의 아버지는 스튜어트 가문 출신, 어머니는 프랑스 왕족 출신, 할머니는 잉글랜드 튜더 왕가 출신이다. 메리 여왕은 최고의 성골로 남다른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메리는 5세 때인 1548년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유학을 빙자해 비밀리에 프랑스로 보내졌고, 프랑스에서 12년 동안 사교계의 ‘디바’가 된다. 메리는 15세에 이미 178㎝까지 성장했고 작은 얼굴과 긴 목, 적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 가늘고 짙은 눈썹을 자랑했다. 21세기 모델 같은 몸매를 지녀 누구든지 반할 만했다. 게다가 지성까지 겸비했다. 메리를 눈여겨보던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는 프란시스 왕자와 정략결혼을 시켰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앙리 2세는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았고, 메리를 통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를 함께 통치하게 됐다.

메리의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결혼 1년만인 1559년 프란시스가 뇌종양으로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과부가 된 여왕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골프에 매달렸다. 그러나 메리의 남성 편력과 불행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메리는 23세를 갓 넘긴 1565년, 3세 연하의 사촌 동생인 단리 경과 결혼한다. 하지만 왕위 자리를 탐내던 새 남편과는 사이가 틀어졌다. 메리는 정부를 두고 있었다. 남편이 자신의 정부를 죽이자 복수를 결심했다. 여왕은 남편이 골프를 치고 오던 날 왕좌를 미끼로 남편을 별궁으로 초대한다. 들뜬 기분으로 침대에 앉은 단리는 아내가 샤워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여왕은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뒤이어 굉음과 함께 별궁이 폭파됐다. 침실에 설치된 폭탄으로 벌거벗은 단리는 무참하게 살해됐다. 사고를 가장한 살인극이었다. 메리는 남편의 장례식도 안가고 당당하게 골프장에 나갔다.

국민들은 여왕을 불신했고 메리는 왕위를 빼앗겼다. 메리는 잉글랜드로 피신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몸을 의지한다. 둘은 고모와 조카 사이였다. 그러나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정적인 메리를 성안에 감금시켰다. 메리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해 왕권 탈환을 획책하는 등 여러 차례 거사를 도모했지만, 매번 수포로 돌아갔다. 18년간 감금됐던 메리는 1587년 2월 7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죄목은 남편 살해와 남편이 죽은 지 이틀 만에 골프를 쳤다는 괘씸죄. 물론 왕권 다툼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패한 게 처형된 가장 큰 이유였다. 중세시대의 ‘로망’이던 메리는 최초의 여왕이자 최초의 공식 여성 골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남양주골프박물관장

장거리 목표물 맞히는 ‘주 데 메이’ 놀이 유행… 메리, 골프 대중화 이바지

메리 여왕이 프랑스의 세자비 시절이던 1558년 프랑스에는 스코틀랜드 방식의 골프라는 유희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주 데 메이(JEU DE MAIL)’라는 골프와 비슷한 놀이를 프랑스 사람들은 즐겼다. 주 데 메이는 볼을 때리는 클럽 헤드의 면이 골프와 달랐다. 골프는 헤드의 앞면으로 볼을 치지만 주 데 메이는 헤드의 옆면으로 때렸다. 골프는 홀마다 다른 그린과 구멍(홀)이 있지만, 주 데 메이의 목표물은 1개였다. 누가 먼저 적은 타수로 1㎞ 이상의 떨어진 목표물을 맞히느냐가 주 데 메이다. 교회의 정문, 담장, 혹은 성의 기둥, 공동묘지의 십자가 비석 등 목표물은 다양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인근 벨기에 등에서도 16세기 말 ‘장거리’ 목표물 맞히기 놀이가 유행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4세의 프란시스 왕자와 결혼한 16세의 메리는 골프장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프란시스 왕자는 평균치에 못 미칠 만큼 키가 작았지만 준수한 용모에 학식을 갖추었고, 골프 실력도 괜찮았다. 사춘기인 둘이 골프를 즐기는 모습은 프랑스 국민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나둘씩 프란시스-메리 커플을 따라 했고, 골프는 프랑스인의 생활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벨기에 등 인근 국가로 퍼지게 됐다. 비록 온갖 추문으로 얼룩진 생을 살았던 메리지만 골프의 대중화에 이바지한 공만큼은 간과할 수 없다. 메리의 열정 덕분에 골프가 유럽 대륙으로 전파됐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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