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 논설위원

‘대타협’으로 부르기엔 부족했던 9·15 노사정 합의는 결국 4개월 만에 한국노총의 표현대로 ‘파탄’이 났다. 당사자 합의에 기댄 노동개혁은 실패한 것이다.

한노총이 파탄의 구실로 삼은 것은 ‘근로계약 해지’와 ‘취업규칙 변경 완화’ 등 정부의 2대 지침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날을 세우고 있는 쪽은 근로계약 해지, 곧 해고와 관련한 내용이다. 해고는 통상 세 갈래로 진행된다. 정리해고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고, 징계해고는 근로자의 비위 행위 등과 관련 있다. 정부가 이번에 기준을 제시하려던 것이 바로 나머지 일반해고(통상해고)다. 업무 능력이나 성과 불량 등을 이유로 한 해고다. 근로기준법 제23조는 해고 제한 사유로 ‘정당한 이유’를 들고 있을 뿐이어서, 부당해고 신청이 연 1만3000건에 이를 만큼 분쟁이 잦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노동개혁 논의 초반부터 이른바 ‘쉬운 해고’ 프레임을 내걸고 극력 반발했다. 해고 대란이 벌어질 거라는 공포 마케팅이다. 그러나 지난 연말 공개된 일반해고 지침 기초안에 ‘쉬운 해고’를 부추길 내용은 없었다. 저성과자 선정에 공정한 평가 방식을 적용하고, 교육훈련과 전환배치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등 세세한 기준과 사례를 예시했다. 정부의 주관이 빠진 ‘판례 해설서’ 수준이다. 그러자 기업들이 “인사평가 기준과 절차가 더 복잡해졌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해가 상반된 노사가 동시에 비판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고용노동부 주변에서는 한노총의 파탄 선언이 자충수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민노총과 달리 노사정 논의에 참여한 한노총은 최대 쟁점이었던 일반해고·취업규칙에 진전이 없자 지난해 4월 결렬을 선언하고 투쟁 기조로 돌아섰다. 그때 정부 비판 무기로 앞세운 것이 민노총의 ‘쉬운 해고’ 프레임이었다. 그런데 9·15 합의 뒤 “쉬운 해고라 하더니 이제 그것을 용인하자는 것이냐”는 내부 강경파의 반발에 부닥친 것이다. 한노총 지도부는 파탄을 선언하면서도 정부 지침의 내용에 대해선 별 언급이 없었다.

노동개혁 과정 전반을 들여다보면 ‘쉬운 해고’ 프레임에 당한 쪽은 오히려 고용부다. 이기권 고용부 장관은 지난주 논설위원 간담회에서 2대 지침을 두고 “확언컨대, 쉬운 해고는 없다”고 했다. 한노총의 반발이 근거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노동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일을 진행해왔다는 얘기도 된다. 이 장관은 “한국에서 해고 관련 입법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노동개혁은 왜 하는가 하는 원천적인 질문이다. 박근혜정부가 노동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린 것은 정규직 노조 중심으로 편중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깨고, 청년·비정규직·실직자 등 노동 약자들의 기회와 처우를 개선하자는 것 아닌가. 그걸 이루려면 고용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과감한 처방이 뒤따라야 하고, 해고 규정도 그 하나다. 나흘간 무단결근하고 해외여행을 다녀와도 해고를 못 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성과자를 보호하려고 일할 열정과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가.

개인은 물론 가정에도 타격을 주는 해고는 민감한 단어일 수밖에 없다. 2002년 이탈리아에서는 경직적인 해고법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노동법학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10년 뒤 경제위기에 직면하면서 그의 주장대로 법이 개정됐다. 전통적으로 근로자 보호에 역점을 둬왔던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도 저성장 극복을 위해 고용법제 개정 등 노동개혁에 나서고 있다. 일본 역시 ‘한정 정사원’ 제도 도입으로 쉬운 해고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반면 한국의 노동개혁은 5개 입법 작업이 4월 총선까지 요원하고, 그나마 기간제법은 정부가 포기했다. 일반해고 지침에도 정부의 철학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최소한 경쟁국 수준으로 제조업 파견을 허용하고, 해고 경직성을 줄이는 입법에 나서는 정도는 돼야 했다. 박 대통령의 강도 높은 표현을 들으며 누구나 호랑이를 예상했지만, 정부가 그리려 한 것은 고양이였고, 그나마도 진척이 없다. 노동계 일각의 과장된 ‘쉬운 해고’ 프레임을 넘어설 용기가 없었던 박 정부의 완패다. 이제라도 새 판을 짜지 않으면 박 정부의 노동개혁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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