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중얼거림 안되게
아직도 한편에 20번 고쳐
영원히 숙달되지 않을 작업”
쉬운 언어들로 일상 담아내
“늙고 병드는 건 확실한 미래”
여유있는 시선으로 삶 그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인간이 맞는 가장 확실한 미래예요. 슬퍼할 일이 아니지요, 다시 다 돌아가는 거니까.”
김광규(75) 시인은 담담히 노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최근 열한 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문학과지성사)을 낸 그를 18일 문화일보사에서 만났다. 그는 “내 나이쯤 되면 함께 지내던 이들 중 살아있는 사람보다 떠난 사람이 더 많아지는 임계점이 온다”며 “꿈에서 벗들을 만나면 그게 내세인 것 같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 생과 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올해로 등단 40년, 그가 종심(從心·일흔) 이후 쓴 66편의 시를 담은 이번 시집에는 몸에 이상이 생긴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는 망막전막으로 “이동침대에 실려 수술실”을 가고, 산책로에서 넘어져 “8주 동안 허리병을 앓았다”. 비행기에서는 평소 앓던 심장 문제로 쓰러져 짧은 블랙아웃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 시인은 “건강이 내리막길에 접어들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들 자기 나름의 병력은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이런 관조(觀照)와 여유의 자세는 그가 일궈 놓은 시 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이다. 그의 시에는 감정 과잉이나 조바심을 찾을 수 없다. 세상사를 멀리서 바라보며 전체 풍경을 읽는다. 그는 “타고난 기질이, 현실에 분노를 표출하고 무언가를 두들겨 부숴야 하는 영웅이 못 된다”고 했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애써 들추거나 깊은 슬픔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시집에 실린 수필가 전숙희(1916∼2010)와 문학평론가 김치수(1940∼2014)의 조시(弔詩)에서 “벽강(전숙희의 호)은 잠깐 외국에/ 나가셨나요”(시 ‘벽강은 마음속에서’) 묻고, “우리도 그곳으로 따라갈 터이니/ 이곳에서 늘 그랬듯이 그곳에서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게”(시 ‘그대 가 있는 곳’)한다. 시 ‘쓰지 못한 유서’에서는 “후세에 남길 만한 멋진 말”을 고민하다가 “유서 한 장 제대로 못 남기고 세상을 뜨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유머러스한 어법은 관조의 절정. 그는 목도리를 잃어버리고서도 “그래도 목을 잃어버리지 않고/ 목도리만 없어져 다행이지”(시 ‘까만 목도리’)라고 노래하고, 들판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양치기 소녀의 모습이 꼭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며 “소녀의 옆얼굴 보니 이곳에서도/ 와이파이 터지는 듯”(시 ‘가을 소녀’)이라고 농을 친다.
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쉬운 언어로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는 특유의 시작(詩作)법을 이어갔다.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그의 시는 평범한 것을 통해 심오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했다. 언뜻 보기 쉬운 시, 그러나 쉽게 쓰이지 않았다. 김 시인은 “40년 동안 800편이 넘는 시를 발표했지만, 시 쓰기는 영원히 숙달되지 않을 작업”이라며 “한 편의 시를 20여 번은 고친다”고 했다. 그는 “나조차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리까리’한 무언가를 전달하려면 그만큼 사람들이 이해하게끔 써야 한다”며 “독자들과의 최대공약수를 넓히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시단에서 난해한 시가 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은밀한 속삭임도 못되고, 혼자만의 중얼거림이 되는 시를 쓰고 있지는 않은가 고민해야 한다”며 “본인도 알 수 없는 관념이 넘쳐나는 것은 체험의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게 더 애착이 가는 시를 물었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쓰고 싶다며 시집을 펼쳤다. 시 ‘한식행(寒食行)’이었다. 한식날 성묘를 갔다가 잔디밭에서 낮잠을 잔 경험이 담겼다. “퍼뜩 낮잠에서 깨어보니/ 여기가 어딘가/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곁/ 죽음처럼 안락했던 그곳/ 꿈결에 잠깐 다녀온 듯”.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사진 = 곽성호 기자 tray9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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