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인 1934년 충남 논산 태생인 그는 스물두 살 때인 1956년에 김동리를 비롯한 당대의 문학 권력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에 발표해 일약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20대부터 10여 년 동안 몇 개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할 때, 시인 김수영과 벌였던 ‘불온성 시(詩) 시비’는 문학에서의 순수·참여 논쟁으로 비화해 이어령에게 뜻하지 않은 각인을 찍는다. 순수(보수)로부터, 참여(진보)로부터 모두 경원시(敬遠視)되는 묘한 지점, 혹자는 ‘회색 지대’로 비딱하게 봤지만, 이어령은 이를 창조의 공간, 그레이 존(gray zone)으로 활용했다.

―문학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문학사상’의 주간을 13년 정도 했고, 이후 문학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아니에요. 문학은 내가 얼마나 많이 해요. 내가 대학에서 한 강의 노트만도 신라 향가부터 어마어마하지. 최근에 ‘언어로 세운 집’, 20년 전에 쓴 것인데 다시 펴내서 1만 권 이상 나가잖아요. 그건 희망이 있는 거예요. 문학이 아니라 문단(文壇)하고 작별을 한 것이죠. 나는 문단이라고 안 하고 문당(文黨)이라고 해요. 거기는 당이야. 잘못 발을 들이면 아무것도 못해.”

―평단에서는 선생님의 문학적 성과에 대한 본격적인 평(評)이 많진 않습니다.

“그건 당연하죠. 나는 이념 싸움을 안 했거든요. 한국 문단이 정치를 했지, 문학을 했나요. 그걸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내가 버린 것이 아니에요. 나는 문단에 끼고 싶지도 않고, 그런 것을 평단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김수영과 논쟁을 한 것이죠. 사람들은 김수영 시에 내가 ‘불온시’라고 붙인 줄 알아요. 김수영이가 불온시라는 말을 썼어요. 그렇게 잘못 떠도니, 나중에는 내가 무슨 독재를 옹호한 것으로 곡해돼 있어요.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은 좌파 문학평론가로 나와 반대편에 선 사람 아닙니까. 그가 나를 인정하잖아요. 30년이 지나서.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 보았어요?”

이어령은 어느 글에서 “나 자신의 문학은 실제의 자신이 세상에 의해 위조된 자신에게 대항했던 기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논설위원 시절 경향신문에 연재한 첫 ‘한국인론(論)’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출간됐을 때, 출판사 직원 한 명이 붙어 온종일 인지를 찍었다는 얘기는 전설처럼 전한다. 책을 읽을 만한 한국인 치고 그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그는 36세에 12권짜리 전집을 낼 정도였고, 이후에도 최근까지, 자신도 정확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저서를 냈다.

엄주엽 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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