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 ‘프리마베라’. 비너스를 중심으로 좌우 신들이 펼치는 봄의 향연은 영혼은 끊임없이 윤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 ‘프리마베라’. 비너스를 중심으로 좌우 신들이 펼치는 봄의 향연은 영혼은 끊임없이 윤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술 철학사 / 이광래 지음 / 미메시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작(大作)이다. 가로세로 140×220㎜, 도판을 담은 미술책치고는 다소 작은 판형이다. 당연히 부피가 커져 책들은 저절로 목침을 떠올리게 한다. 1권 992쪽, 2권 832쪽, 3권 832쪽. 원고지 8400장, 모두 2656쪽에 이른다. 집필기간만 2007년부터 7년이 넘게 걸렸고, 보기 드문 지적 노고에 형상을 부여하기 위해 도판을 확보하고 저작권을 해결하는 등 편집에 애쓴 기간도 열여덟 달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한 분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자료를 축적하며 궁리를 거듭한 정진(精進)의 세월이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을 책이다.

다루는 내용 또한 방대하다. 여행은 기독교신학의 억압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에 눈뜬 르네상스 초기 피렌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종착점은 휴먼스케일을 넘어 미술의 영역을 우주공간으로까지 확대하려는 ‘빛의 예술’ 레이저 아트에서 일단 머무른 채 미래로 열려 있다. 미술의 전 영역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빠짐없이 시대를 세로내리면서, 동시에 한 시기마다 창조적 욕망의 지도를 넓게 펼치면서 가로지른다. 이 덕분에 씨줄과 날줄이 갖춰져 미술이 탄생하고 퍼지고 사그라지는 장(場)이 남김없이 포획됐다. 대작의 이름을 부여해도 결코 헛된 말은 아닐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아주 엄혹한 시기에 저자는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을 번역해 소개하고, 그 사상을 개설한 두툼한 저서를 펴냄으로써 ‘탈구조주의’라는 새로운 비판이론의 인도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 영향 아래에서 공부했던 세대의 한 사람이기에 이 책을 접하자마자 기대감과 함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푸코의 장쾌한 분석을 떠올렸다. 뽕밭이 푸른 바다로 바뀔 만한 오랜 세월 동안, 그 분석이 열어둔 지평이 근대 이후 서양 미술 전체로 어떻게 확장돼 갔는지를 훑는 일은 과연 설 연휴 닷새를 온전히 소진할 가치가 없지 않았다. 반평생에 걸쳐서 미술과 철학의 만남을 살펴온 저자의 지적 인생이 마련한 거대한 축제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저자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예술가에게 철학의 빈곤은 그를 공허한 장인으로만 머물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위대한 미술가는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손끝의 재주인 기예로써 작품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자율적 사고가 먼저 높이와 깊이를 획득한 후 그 표현 욕망이 작품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은 “욕망의 통로 가운데 하나인 감성을 빌려 그리는 철학”이다. 철학이 앞에 있고 조형은 나중에 도착하므로, 철학이 모자란 화가는 공허한 장인에 불과하므로, 미술 철학자는 “미술의 역사를 철학으로 가로지른다.” 미술의 역사에서 ‘방법으로서의 양식’이 아니라 ‘의미(철학)로서의 내용’에 주목한다.

이 책의 첫머리를 이루는 시기가 르네상스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전까지 예술가들은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고 지배 권력(기독교)의 명령에 따라 억압된 채로 작품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철학 부재의 시대를 살았으며, 그리스 철학이 되살아난 르네상스 시대에야 비로소 ‘철학의 세례’를 받은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정체를 질문하고 미술의 본질을 사고할 수 있는 자율성을 획득함으로써 ‘공허함’에서 벗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로소 알찬 미술, 즉 철학으로 가득 찬 미술의 역사가 계보를 짜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과 철학 사이에서 저자의 저울은 일말의 균형조차 없이 철학 쪽으로 현저하게 기울어져 있다. ‘미술 철학사’는 철학적 문제로 점철돼 있는 미술사(철학적 미술사)라기보다 미술로 표출된 철학사(미술적 철학사)다. 이 두꺼운 ‘미술책’에서 거의 미술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당대와 현대의 자료를 섭렵하면서 미술의 걸작 하나하나에 세세한 빛을 던질 때조차도 저자의 시선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에 새겨진 시대(철학)의 각인에 놓인다. “입체주의건 초현실주의건, 팝 아트이건 개념주의이건 그 양식들은 저마다 새로운 이념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방법”이라고 하면서 위대한 예술의 여부를 단두대 칼날을 내려치듯 선명하게 심판한다.

“위대한 예술가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 작가들에게 부족하거나 결핍돼 있는 것은 독창적인 상상력이라기보다 철학적 사고력이다. 반대로 철학적 사고력의 깊이와 독창성 때문에 예술가와 그의 작품은 위대함과 창의성의 명예를 얻게 된다.”

‘철학 중심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예술을 이념의 구현으로 보는 저자의 발상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실현으로 본 헤겔을 은밀히 연상시킨다. 그런데 욕망의 가로지르기를 논하면서 동시에, 예술적 표현을 이념의 진격으로 보는 사유틀을 미술사 전체에 덧씌운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그 미묘한 어긋남이 예술에 대한 철학의 우위를 확증하려는 과도한 일반화를 책에 남겼을 것이다.

장은수 순천향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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