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세로 붓을 떨어뜨리니/ 바람과 우뢰소리 일어난다/ 홀로 서릿발 같은 붓을 잡고/ 마귀의 진(陣)을 무찔러서 열어가는데/ 만약에 진짜 용이나 호랑이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어찌 우주의 참 기운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한국화의 거장으로, ‘선(線)과 점(點)을 통해 단순하면서도 다채롭게 인간을 표현하는 세계적 작가’라는 평판을 듣는 산정(山丁) 서세옥(87) 화백이 예술적 기개(氣槪)를 나타낸 시다. “내 그림은 동·서양화를 합친 장르”라고 밝힌 적도 있는 그는 1959년 ‘선의 변주’와 1962년 ‘점의 변주’ 등 주목받은 초창기 작품부터 시적이면서 철학적이었다.
그는 “그림은 무극(無極)의 세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무극’은 ‘우주의 근원이 되는 조화로움의 지극한 경지’ ‘완전한 우주 시원(始源)의 자리’ ‘도(道)의 뿌리’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노자(老子)의 ‘도덕경’ 제28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산정이 “넓은 하늘과 지나가는 구름이 붓을 통해 내 앞에 펼쳐진다. 내 붓끝으로 북두칠성·은하수·달·태양 등도 끌어올 수 있다”며 “실상(實相과)과 허상(虛相)이 조화를 이루면 모두 정토(淨土) 아닌가” 하고 말하는 취지인 ‘시작도 끝도, 철학도 예술도 하나로 합일하는 세계’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의 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듣는 것이 관음(觀音)이요, 절대의 향내를 코로 느끼지 않고 귀로 느껴야 하는 것이 문향(聞香)의 경지”라고 말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붉은 인주(印朱) 색이 눈에 거슬린 뒤로는 낙관(落款) 대신 흑색 연필로 서명하는 배경도 다르지 않다.
‘수묵(水墨) 추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그는 1970년대부터 ‘가장 존귀한 존재가 인간’이라며 그려온 ‘인간 시리즈’를 포함해, 1960∼2000년대의 시대별 대표작 100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를 기념하는 특별전 제1부에 이은 제2부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1월 12일 시작돼 오는 3월 6일까지 이어진다. 흘림과 삐침, 건묵(乾墨)과 농묵(濃墨) 등의 기법으로, 추상 속에 구체적 형상과 움직임을 상징·압축한 ‘사람’ ‘사람들’ ‘군무(群舞)’ 등 제1부 전시 작품과 교체된 2000년 이후 대표작 50점을 통해, 산정이 품은 ‘무극 세계’의 한 자락이나마 느껴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뿌듯한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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