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권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최종 판정하는 권능을 가진 미 연방대법원의 대법관 9명. 아래 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클래런스 토머스, 소니아 소토마요르, 스티븐 브라이어, 새뮤얼 얼리토, 엘리나 케이건, 루스 긴즈버그, 앤서니 케네디, 존 로버츠(대법원장),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 미국 보수의 상징으로 불려온 스캘리아 대법관이 지난 13일 텍사스에서 급서함에 따라 후임 대법관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미 정치권의 논란이 깊어지고 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미국 정치권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최종 판정하는 권능을 가진 미 연방대법원의 대법관 9명. 아래 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클래런스 토머스, 소니아 소토마요르, 스티븐 브라이어, 새뮤얼 얼리토, 엘리나 케이건, 루스 긴즈버그, 앤서니 케네디, 존 로버츠(대법원장),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 미국 보수의 상징으로 불려온 스캘리아 대법관이 지난 13일 텍사스에서 급서함에 따라 후임 대법관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미 정치권의 논란이 깊어지고 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신보영 / 워싱턴 특파원

앤터닌 스캘리아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의 지난 13일 갑작스러운 타계가 미국 정치권에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 사회가 다분화하면서 최종 판정 기관으로서 연방대법원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보수 5명 대 진보 4명’으로 구성된 현행 체제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캘리아 대법관의 후임이 보수 성향 인사인지, 진보 성향 인사인지에 따라 과반이 바뀐다. 11월 8일 대선을 앞둔 민주·공화당은 누가 대법관을 지명하느냐를 놓고 격돌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민주·공화당 모두 2000년 대선에서 재검표 중단을 판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최종 결정한 곳이 연방대법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 체제 변화가 대선과 맞물렸던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가까운 사례는 1988년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 임명이다.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에 대한 승인권을 가진 상원은 1차 지명자인 로버트 보크를 부결시키고, 2차로 지명된 더글러스 긴즈버그의 중도 하차를 거쳐 결국 케네디 대법관 임명에는 동의했다.

대선과 맞물리지는 않았지만 2006년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 지명 당시에도 일부가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를 통해 인준을 막겠다고 나섰지만, 민주·공화당 중도파 인사 14명이 연합해 이 시도를 좌절시켰다. 미국 특유의 협상과 타협의 정치 전통이 극단으로 치닫는 정파 갈등을 막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불과 10년 전 중도 연합으로 대법관 인준을 성사시켰던 14명 중 상원에 남아 있는 인사는 3명뿐이다. 중도 인사가 줄고, 극단적 목소리를 내는 정파가 늘었다는 의미다. 미국 민주·공화당 경선에서 ‘아웃사이더’ 돌풍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공화당 경선에서는 성·인종 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가 선두를 달리고, 민주당에서도 미국에서는 드문 ‘사회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버몬트) 상원의원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추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임 대법관 임명 문제는 미국식 정치체제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저명한 정치학자인 고(故) 로버트 달 전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는 2001년 저서 ‘미국 헌법은 얼마나 민주적인가’(번역본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에서 “행정부와 입법부 간 상호견제에 의한 갈등으로 정치와 정부 기능이 교착·마비 상태로 빠져들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의 권력이 비대해졌다”면서 비판한 바 있다. 실제로 2012년 선거에서 미국인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허용하면서도 상원에서 다수당의 지위는 공화당에 줬다.

2013년 연방정부 셧다운(잠정폐쇄)이 행정부·입법부 간 극단적 분열의 전조였다면, 이번 대법관 임명 문제는 2번째 파열음이다. ‘협상의 정치’가 사라지자 연방대법원의 기능과 권한은 더욱 커지게 됐고, 이는 행정부·입법부가 각각 대법관 임명을 놓고‘강행’과 ‘무조건 반대’를 내세우면서 더욱 정치를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에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이미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과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헌 결정으로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권한을 확인한 바 있다. 게다가 한국의 사법부 체계는 보다 덜 민주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미국의 대법관 지명권은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에게만 있지만, 한국에서는 헌재 재판관 9명 중 3명은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대법원장이 지명한다. 이런 구조에서 협상·타협의 정치 문화가 훨씬 얕은 한국 사회가 현재 미국이 처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법부에 대한 의존도가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고, 이는 또다시 극단적인 정치 분열로 이어질 개연성이 짙다. 당장 우리에게 떨어진 급한 불은 아니지만, 미국이 이번 대법관 임명을 둘러싼 논란을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해결할지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boyoung22@munhwa.com
신보영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