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야당 국회의원 시절이던 2002년 5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난 뒤 이렇게 밝혔다. “남북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진심을 바탕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야만 발전적인 협상과 약속을 기대할 수 있다.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 그들도 약속한 부분에 대해 지킬 것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북한 방문을 통해 이런 확신을 얻었다.” 이런 인식이 집권 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토대가 됐다. 그런데 16일 국회 연설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기만과 위협에 끌려다닐 수는 없으며, 도발에 굴복해 지원하는 일도 더 이상 안 될 일”이라며 ‘체제 붕괴’까지 거론했다.
박 대통령의 대북 압박은 과거 역대 정권과는 차원이 다를 가능성이 크다. 미생지신(尾生之信) 논쟁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정치적 고집’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신(新)전략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이제야 남북관계에서 ‘비정상의 정상화’ 길이 열리게 됐다. 2개월 뒤 총선, 내년 말 대선 결과에 따라 영향을 받겠지만 변동 폭이 그리 크지는 않을 전망이다. 북핵이 한계상황에 도달했고, 국민 여론도 강력 대응 쪽으로 돌았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은 원칙보다는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했다. 방황 끝에 국가적 결의가 결집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앞으로 한반도에 닥쳐올 거대한 지정학적 파도들을 예상하면 더욱 그렇다. ‘도발의 역설’이다.
근대사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이 현재의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세력 균형지대’여서, 현상 변경이 시도될 때마다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사 갈 수도 없으니 스스로 생존의 혈로를 뚫을 수밖에 없다. 한번은 실패했고, 한번은 성공했다. 19세기 말 중화 패권이 흔들리고 일본이 부상할 때, 한반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무대가 됐다. 일본은 대륙 진출을 위해, 중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는 남진을 위해 한반도를 원했다. 영국조차 러시아 남하를 막는다며 거문도 사건을 일으키고,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각축 끝에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반세기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했다.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한반도 분할 점령과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미군보다 훨씬 일찍 진주한 소련 군대가 38선을 점령 경계로 하자는 미국 요청을 순순히 수용하는 바람에 전면 공산화는 피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 전체를 장악해 세력 균형을 깨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결국 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남한 지역 총선거에 이은 건국, 6·25전쟁의 와중에 한·미 안보조약을 관철한 덕분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존속과 성장·발전이 가능했다.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면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대목이 수두룩하다.
다시 흥망(興亡)의 기로에 진입하고 있다. 중국 부상에 따른 동북아 동요는 강대국들의 ‘한반도 3차 접전’을 예고한다. 이미 시작됐다. 게다가 통일 자체가 한반도 세력 균형의 변화를 의미한다. 중국은 북한의 존속, 즉 통일을 지연시키면서 한·미 동맹 약화를 기다릴 것이다. 미국과 일본 역시 중국·러시아와의 충돌 요인 추가를 바라지 않는다. 한·미 동맹이 강력하지만,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나 1·2차 세계대전 전후(戰後)회담에서의 한국 배제, 6·25 직전의 애치슨 라인을 보면 무작정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결국 대한민국이 주도적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통일도, 북한의 근본적 변화도 불가능하다.
21세기 한반도 통일과 재도약은 가능할까. 현세대에 달렸다. 올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북한의 판문점 도끼 만행에 대해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며 무력 대응 불사를 외친 지 40년 되는 해다. 이젠 도끼가 아니라 핵무기다. 국력을 결집해 북한에 맞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940년 히틀러의 공세 앞에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노력, 눈물과 땀뿐입니다. 우리 정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괴물 독재자에 맞선 전쟁입니다. 목표가 무엇이냐고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연한 국가적 각오를 다질 때다.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