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경남 해인사 백련암 뜰에서 성철 스님(가운데)과 법정 스님(오른쪽), 훗날 송광사 주지를 지낸 현호 스님이 함께 사진촬영을 한 모습.
1973년 경남 해인사 백련암 뜰에서 성철 스님(가운데)과 법정 스님(오른쪽), 훗날 송광사 주지를 지낸 현호 스님이 함께 사진촬영을 한 모습.
원택 스님, 두 선승 문답 담은 ‘설전’ 출간

한국 불교의 대표 선승(禪僧)인 성철 스님(1912∼1993)과 법정 스님(1932∼2010)의 문답을 담은 책 ‘설전(雪戰)’(책읽는섬)이 출간됐다. 경남 해인사 백련암에 머문 성철 스님과 전남 송광사 불일암에 터를 잡은 법정 스님의 인연을 떠올리긴 쉽지 않다. 더욱이 성철 스님은 대중 앞에 나서기보다 산사에서 엄격한 자기 수행과 후학 지도에 집중했고, 법정 스님은 ‘무소유’ 등을 통해 수필가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인상차가 확연하다.

이번 책을 엮고 증언을 더한 이는 성철 스님의 상좌이자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인 원택(사진) 스님. 두 스님의 만남에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던 그를 16일 서울 종로구 한 찻집에서 만났다. 원택 스님은 “1967년 성철 스님이 해인사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될 당시 법정 스님은 경전을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해인사 강원에 머물렀다”며 “이해 12월부터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이 이어지는데 법정 스님은 빠짐없이 설법을 들었다”고 전했다. 스님은 “‘백일법문’의 녹취록을 책으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법정 스님이 묻고, 성철 스님이 답하는 대목이 여럿 발견됐다”며 “두 분이 아니면 이런 수준의 대화를 남길 수 없다는 생각에 50년 전의 역사적 현장을 책에 담았다”고 했다.

책을 보면 당시 30대 청년이었던 법정 스님은 법문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입니까”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등 질문을 던진다. 귀찮을 법도 한데 성철 스님은 그때마다 친절히 답한다.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이 ‘뭘 그리 물어쌌노’라며 쏘아붙이면 법정 스님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물어야 한다’는 식으로 응수하기도 한다”며 “성철 스님은 후학들에게 엄격하고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했지만 유독 법정 스님은 살갑게 대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아마도 한 ‘성깔’하면서 줏대 있는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며 “성철 스님은 ‘법정이만큼 자기 양심 지키며 사는 중은 없잖아’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부연했다.

하지만 두 스님 사이에 갈등도 있었다. 성철 스님은 자신을 만나려면 3000배를 해야 한다는 규정을 놓았는데, 법정 스님이 마음이 담기지 않은 3000배는 ‘굴신운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조의 글을 대한불교(현 불교신문)에 기고하면서 불거졌다. 원택 스님은 “법정 스님이 방에 없을 때 그의 물건들이 치워졌고, 스님은 아무 말 없이 해인사를 떠났다”며 “화가 난 성철 스님의 후학들이 충성심이 발동해 벌인 일이었지만 오해가 싹텄다”고 말했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성철 스님이었다. 12년 뒤인 1980년,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이 쓴 ‘본지풍광’과 ‘선문정로’ 원고를 들고 법정 스님을 찾았다. 원택 스님은 “‘한글 글쓴이로는 법정이 최고니 윤문을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라는 명이었다”며 “‘싫은 눈치가 보이면 사정하지 말고 돌아오라’는 당부도 있었지만, 다행히 법정 스님은 단번에 부탁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스님은 “이후 법정 스님은 2년에 한 번꼴로 성철 스님을 찾아 인사를 올렸고, 성철 스님이 입적했을 때 추모사를 쓰기도 했다”며 “두 스님은 세속 나이로 20년 차이니 아버지와 아들뻘에 가까웠지만 세대 차를 떠나 구도의 길을 함께 걷는 인연을 이어갔다”고 했다.

책에는 ‘백일법문’ 때의 대화와 함께 1982년 두 스님이 나눈 대담도 실렸다. 원택 스님은 “불교적 교리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현문과 현답이 이어진다”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큰 스승의 말씀이 되살아나 큰 울림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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