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렬이는 아마 사회에 나가면 바로 코미디계에서 스카우트해 갈 거야.’ 지난 15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코미디언 이홍렬(62) 씨는 서울공고 재학시절 오남길 교사와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오 교사에게 들은 칭찬의 한마디를 연거푸 되뇌었다. 오 교사는 1971년 이 씨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해에 담임선생님이었다. 그 시절 이 씨는 일기장에 사흘에 한 번꼴로 ‘나의 꿈은 코미디언’이라는 문구를 적을 정도로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남들을 웃기는 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코미디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코미디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코미디언이 되기가 쉽지 않고, 막상 코미디언이 된다고 해도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씨가 평소처럼 친구들 앞에서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오 교사가 이 씨를 치켜세우면서 이 같은 칭찬의 말을 건넨 것이다.
이 씨는 “생각지도 못한 선생님의 말씀에 적잖이 놀랐다”며 “한없이 깜깜할 것만 같았던 내 인생에 선생님께서 한 줄기 빛을 비춰주시는 것만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편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나를 그렇게 평가하셨을까’ ‘코미디계에서 어떻게 나를 스카우트한단 말인가’라고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이 씨는 오 교사의 격려 한마디를 원동력 삼아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매진하다가 1978년 11월 그룹 산울림의 콘서트 무대에 서면서 코미디언으로 데뷔했다.
그는 “당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며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가 나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40년 가까이 연예계 생활을 이어오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오 교사의 격려를 떠올리며 힘을 냈다. 그는 “고교 시절 선생님의 한마디가 40여 년 연예계 생활의 버팀목이 됐다”고 고백했다.
이 씨는 졸업 후에도 오 교사를 잊지 않고 꾸준히 찾는다. 2009년에는 서울공고 동창들 여럿이 모여 오 교사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직접 찾아뵙지 못할 때는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 그는 “지난달 7일 심장 수술을 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후 한동안 안부를 여쭙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에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다”며 “선생님과의 추억을 인터뷰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4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온 이 씨와 오 교사 사이에는 웃지 못할 추억도 많다. 이 씨가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에서 스승의 날 특집방송을 하면서 오 교사와 전화 연결을 하다 실수로 사망소식을 잘못 전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씨는 “얼마간 선생님께 연락을 못 드리다가 특집 방송에서 선생님과 전화 연결을 시도했는데 사망 소식을 접했다”며 “알고 보니 동명이인의 사망 소식이 잘못 전달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방송 직후 오 교사가 라디오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사망 소식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 씨는 “오 선생님께서 방송국에 전화하셔서 ‘나 안 죽었다’며 유쾌하게 웃어주셔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며 “제자의 실수를 웃음으로 넘길 줄 아는 마음이 넓으신 분”이라며 오 교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이 씨는 올해에는 오 교사와 여행을 갈 계획이다. 그는 “선생님의 건강이 회복되면 여행도 모시고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씨는 오 교사 외에도 서울공고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김종성 교사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으로 꼽았다.
이 씨는 “김 선생님께서는 교내 장기자랑대회를 앞두고 학생들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꼭 홍렬이에게 가지고 가서 의논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다”고 밝혔다.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호랑이로 통할 정도로 엄했던 김 교사에게 인정받았던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는 “선생님께 웃기는 재주를 인정받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며 “그때 그 순간은 마치 가슴속에 스틸 사진을 한 장 찍어 놓은 듯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이 씨는 가난한 가정환경에 키도 작고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었던 자신이 연예인이 되고 최고의 인기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 교사와 김 교사 같은 선생님들의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세상 모든 선생님의 한마디는 학생들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며 “선생님은 제자에게 일단은 무조건 칭찬하고 볼 일이다”고 말했다. 이 씨는 고교 시절에 한 친구가 교사의 한마디 때문에 비행의 길을 걷는 것을 보고도 학생의 인생에서 교사가 미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내 친구 중 하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반 친구들의 투표로 반장에 당선됐는데 ‘넌 키가 작으니 반장을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반장을 하지 못했다”며 “충격을 받은 친구가 고교 3년 내내 비행의 길을 걷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스승인 오 교사와 김 교사처럼 어린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1986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매달 102명의 학생을 후원 중이다.
이 씨는 재단에서 주최하는 소년소녀가장 돕기 행사의 사회를 보고 행사비를 받은 것이 마음에 걸려, 받은 행사비로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재단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선생님들에게 받은 사랑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능력껏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성남 = 정유진 기자 yooji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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