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 절이 흩어지고 난 뒤 남은 빈터를 뜻하는 말이다. 오래되며 흩어진 시간과 누군가의 간절했던 소망. 지금은 없지만, 이런 것들을 마음의 눈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그중에서 으뜸이라 할만한 곳을 가려 뽑아봤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대체 뭐하러 가냐’는 질문에 대비하기 위해 그나마 ‘볼 게’ 있는 곳으로 추렸다. 그렇게 뽑은 폐사지 4곳을 소개한다.
# 강원 원주 거돈사, 흥법사, 법천사
남한강을 두고 삼국이 쟁패하던 땅이어서 그럴까. 강원 원주 땅에는 유독 폐사지가 많다. 대표적인 폐사지 3곳이 흥법사지와 거돈사지, 그리고 법천사지다. 세 사찰은 말 그대로 ‘1000년 고찰’이다. 대략 신라 시대에 지어져 고려 시대 전성기를 누리다가 임진왜란 때 불탔다. 고려 때는 이곳 원주의 절집에 왕의 스승이 줄줄이 내려왔다.
원주의 폐사지 세 곳 중에서 가장 잘 정돈된 곳이 거돈사지다. 수령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함께 건물터에는 삼층석탑과 좌대, 원공국사탑 등이 마치 원고지의 빈칸처럼 띄엄띄엄 공간을 두고 서 있다. 흥법사지에서는 석공이 돌을 쪼아서 구름과 용을 그려낸 솜씨를, 법천사지에서는 탑비의 몸돌에 새겨진 세밀한 그림을 눈여겨볼 일이다. 이런 것들만으로도 고려 시대 불교 미술의 화려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폐사지를 돌아본 뒤에 일몰의 시간은 흥원창에서는 만나는 것이 제격이다. 흥원창은 고려에서 조선 시대까지 조창이 있던 자리를 말한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가 마주하는 곳인데 저무는 노을빛이 유독 아름다운 곳이다.
# 경남 합천 영암사지
경남 합천의 황매산 자락에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모산재 아래 영암사지가 있다. 스러진 절집 영암사에 대한 창건기록은 없고 내력에 대한 것만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빈 절집의 탑비에는 고려 현종 때(1014년) 적연선사가 지금의 가회면인 가수현에서 83세로 입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금오산 자락의 절집 선봉사 비석에서는 천태종 5대 사찰로 원주 거돈사, 진주 지곡사, 해주 신광사, 여주 고달사와 함께 영암사가 기록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처럼 유명한 지리지에 영암사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내로라하는 사찰이 지리지에 빠진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영암사지 자리는 석축으로 돋움돼 있는데, 석축 위에 쌍사자 석등을 앉히고, 돌계단을 마치 나무를 깎아내듯 다듬어 양옆에 놓았다. 영암사지의 쌍사자 석등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사자 두 마리가 마주 보며 석등의 화사석을 받치고 서 있는데, 뒷다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화사석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고, 석등에도 다양한 동물문양이 새겨져 있다. 특히 계단 난간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의 모습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 전북 남원 만복사지
전북 남원에는 두 개의 러브스토리가 있다. 하나가 ‘춘향전’이라면 다른 하나는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다. ‘만복사저포기’의 이야기는 이렇다. 노총각인 양생이 절집 만복사에서 부처와 윷놀이와 비슷한 옛 놀이인 ‘저포’를 해서 이겨 소원이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여인은 그러나 실제 사람이 아니라 죽은 부잣집 딸의 영혼이었다. 양생은 배꽃 만발한 봄날 만복사에서 영혼과 사랑을 나누고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게 주된 줄거리다.
만복사는 한때 수백 명에 이르는 승려를 거느렸을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으나 정유재란 때 절집이 불타버린 이후 지금은 오층석탑과 석조대좌, 당간지주, 석조 여래입상 등만 절집을 지키고 있다. 초라한 듯 보이지만, 남아있는 석조유물들은 죄다 보물이다.
특히 전각을 짓고 그 안에다 들인 투박한 석조 여래입상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당간지주 역할을 한 석인상도 눈길을 끈다. 본래 만복사지 옆 도로변에 머리 부분이 노출된 채 땅에 묻힌 것을 2009년 절터 안으로 옮기고, 원래 키를 되찾아 주었다.
# 충남 보령 성주사지
충남 보령의 성주사지는 폐사지가 보여주는 빈 공간의 아름다움을 대표할만한 크고 유서 깊은 절터다. 우선 성주산 아래 너들 평지에 들어선 절집 터의 규모가 그렇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흔적이 두루 묻어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국보 1점과 보물 3점이 빈 절터를 지키고 있다는 점도 무게를 더해준다.
성주사는 본래 백제인들의 호국사찰이었다가 백제가 멸망 후 통일신라 이른바 ‘선종’의 대가인 무염 대사가 다시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선종의 큰 절이 전국에 9개 세워져 이른바 ‘구산선문’이라고 불렸는데, 그중 한 곳이 이곳 성주사였다.
성주사지에서 눈여겨볼 것이 국보인 탑비다. 무염 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지은 것이라는데 10세기 초 세워진 거북 받침돌 위 비석에는 무염 대사의 일생과 업적, 성주사를 일으키고 선종을 전파한 내용이 낱낱이 적혔다. 비석의 재료로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글자 하나하나가 큰 훼손 없이 보존되었다.
빈 절터 한가운데에는 성주산의 모자란 기운을 받치기 위해 삼층석탑 3기를 병풍처럼 나란히 도열해 세워두었는데, 다른 절집에서 본 적 없는 풍경이다. 이와 함께 웃는 듯, 혹은 우는 듯한 표정의 투박한 석불 입상 하나가 특히 인상적이다. 석불은 풍화되고 잘려나가 귀도, 코도 깨진 형상이다. 타원형 얼굴과 양어깨를 덮은 법의에서 소박한 느낌이 전해진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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