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 논설위원

“의로운 일은 역시 외로운 일이군요.” 1939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을 가다(Mr.Smith Goes To Washington)’에서 주인공 제퍼슨 스미스 상원의원이 23시간 동안 발언을 하다 발언권 철회를 요구하는 5만여 통의 전보를 받고 절망하면서 하는 발언이다. 시골 보이스카우트 리더에 불과했던 스미스가 상원의원이 돼 미국의 국부(國父)들이 실현하려고 했던 정의와 자유, 진실을 설파하는 장면은 오래도록 인상에 남는다. 지난 2010년 12월 지금은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백발이 성성한 채 8시간 37분 동안 감세법안에 반대하며 연설하는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필리버스터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돼 있다.

필리버스터 역사가 오래된 미국 상원에서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되 규정을 아주 까다롭게 하고 있다. 주제와 관련 없이 애국가를 불러도 좋고 법전을 읽어도 되지만 일단 말이 끊기면 안 된다. 먹거나 물을 마실 수도 없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뜨면 끝이다. 앉아서도 안 되고 물건이나 사람에 기대서도 안 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리책을 읽거나 마술을 하기도 한다. 영국은 무제한 토론이 가능하지만 의장이 발언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일본은 발언을 하기 위해 1m를 가는데 1시간을 걷는 우보(牛步) 전술을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1969년 8월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개헌을 막기 위해 10시간 15분 동안 발언한 것이 최장 기록이지만, 법안 통과를 막지는 못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1964년 4월 동료인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저지를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처리를 막기 위해 43년 만에 무제한 토론을 벌였다. 1973년 폐지됐다가 2012년 국회 선진화법이 만들어지면서 부활됐다.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려면 선진화법의 의결정족수인 재적 5분의 3(176명)의 찬성이 필요하지만 새누리당 단독으론 불가능하다. 선진화법이 20대 국회에도 계속 살아 있다면 여당이 5분의 3만 넘어가지 않으면 야당이 의석이 적어도 국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소수의 의견도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다수의 권리는 어디서 보장받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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