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은 연일 쏟아지는 경제용어들을 익히느라 분주했다. 외평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SDR(특별인출권), P&A(자산·부채 이전)…. 지금은 생활용어 수준이지만 그때만 해도 생경한 단어들이었다. 일부 기자는 브리핑이 끝나면 득달같이 평소 친한 관료 방에 찾아가 ‘과외공부’를 한 뒤에야 기사를 작성하곤 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발생 무렵, 당시 재정경제부 기자실의 한 풍경이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위기가 코앞에 닥쳤거나 터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신경제용어의 등장이다. 요즘 불쑥 나온 ‘마이너스 금리’도 그런 산물이다.
마이너스 금리제를 도입하면 은행 예금에 이자를 주는 대신 ‘벌금’을 물린다. 아직은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길 때에 한해서다. 이 제도가 현실에 적용된 건 경제학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1910년대 한 무정부주의자의 이론에서나 존재했을 뿐이었다. 실비오 게젤은 “실질 자본의 증가를 막는 주범은 시장 금리이니, 이를 마이너스로 내리면 성장도 잘 된다”고 봤다. 화폐에 발행 시점을 찍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액면가치를 떨어뜨리는 ‘스탬프 화폐’도 제안했다. 하지만 존 케인스로부터 “과격한 예언가”라는 혹평을 받으며 역사 속에 파묻혔다.
현재 마이너스 금리를 채택한 나라는 유럽연합 일부와 일본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따지면 전 세계의 25%다. 얼마 전 금리 인상으로 돌아선 미국도 선택을 곁눈질한다. 이 제도의 지상목표는 ‘죽음의 디플레이션 봉쇄’다. 은행에 묵혀 있는 돈을 끌어내 소비·투자로 돌리겠다는 방책이다. 그러나 진짜 노림수는 딴 데 있다. 외자를 밀어내 자국 통화가치를 절하시키려는 속내다. 기축·준기축 통화국 지위를 이용해 글로벌 환율전쟁에 불을 댕겨 ‘이웃 나라를 거지로 만들자’(beggar-thy-neighbor)는 의도다.
세계는 마이너스 금리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단연 축복보다 저주라는 쪽이 ‘우세’하다. 일본이 결정타다. 이 제도권에 합류한 후 소비·투자는 더 줄고, 은행주는 폭락했다. “오죽했으면 통화정책 끝장까지 갔을까”하는 역심리 탓이 크다. 시장이 정책 효과가 있다고 판단할 때 그 효과도 있다는 로버트 루커스 시카고대 교수 주장과도 일치한다.
국내 경제학자나 언론도 마이너스 금리 성토에 나섰다. ‘환상’ ‘코미디’니 하는 극단적 비판도 나온다. 마이너스 금리는 실패작으로 최종 결론 날 수 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단정 짓는 건 너무 성급하다. 마이너스 금리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작도 나올 만한 묵직한 주제여서 좀더 차분하고 길게 관찰해야 할 사안이다.
이제 마이너스 금리의 단편적 득실을 따지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지금은 경제 주체들이 이 제도의 본질적 실체를 곱씹어볼 때다. 마이너스 금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의미는 뭘까. 경제의 불씨를 지피려는 경쟁국들의 ‘절절함’을 배우라는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 방법을 이것저것 다 구사해보고도 안 되니 교과서에도 없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해 살아남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다. 빤히 보이는 길로 가도 목적지가 없으니 안 보이는 길로도 가보자는 얘기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시도 그 자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가하고 한심하기 그지없다. 각 지표가 ‘경제 비상사태’임을 알리는데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기는커녕 확실히 보이는 길조차 가지 않는다. 규제 완화는 말의 성찬만 있을 뿐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가’는 여전히 금기어다. 추락 일로의 수출·내수 대책은 삼탕, 사탕이다. 청년실업자는 낙망하는데 노동개혁은 도돌이표다. 경쟁국은 4차 산업을 노래하는데 우리는 전 단계인 ‘서비스산업법’을 놓고 5년째 씨름하고 있다. 우리 턱밑까지 와 있는 인구절벽 극복에 꼭 필요한 이민정책은 구호만 있고 실행은 없다. 그런데도 국회와 정부, 기득권층은 ‘네 탓’ 타령만 하며 허송세월이다.
며칠 전 만난 한 중견 경제학자는 “요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이너스 금리는 기존의 경제학을 다시 써야 할 정도의 일대 전환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상징적 사건”이라며 “상상력 없고, ‘발상의 대전환’이 없는 정책으로는 글로벌 경제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단언했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의 ‘냄비 속 개구리’와 ‘잠수함 속 토끼’는 무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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