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의 ‘빛의 제국’은 김영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아르튀르 노지시엘이 연출한 한·프랑스 합작품이다. 이방인의 눈은 ‘우리’를 한층 낯선 형태로 무대 위에 올렸다. 기존 한국 연극에서 볼 수 없었던 동선과 박자, 움직임은 생소하면서도 신선하다. 여기에 두 개의 대형 스크린이 연기자들 뒤에서 또 다른 그림을 그린다. 영화적 미장센을 보여주는 노지시엘 연출의 장기다.
연극은 남파 간첩 김기영(지현준)과 이를 모른 채 15년간 결혼생활을 영위한 아내 장마리(문소리) 두 사람이 서로를 속이고, 진실을 고백하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따라간다. 기영과 마리뿐 아니라 두 사람의 하루 속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각자의 기억을 독백처럼 끄집어낸다. 배역의 기억이 아니라, 배우 개인의 기억이다. 기영은 공작원 훈련을 받던 시절을 회상하다가, 어느 순간엔 배우 지현준이 돼서 어린 시절 반공 포스터를 그리던 이야기를 한다.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에겐 약간 산만할 수도 있는 이 형식은 ‘빛의 제국’을 단순히 ‘소설의 무대화’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실험적인 작품으로 탈바꿈시킨다.
다만 영상과 무대를 절반씩 차용한 독특한 형식을 걷어내면, 연극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새롭지 않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소리의 존재감도 스크린보다 약해 아쉬웠다. 그러나 특별한 기승전결 없이 일정한 속도로 ‘걷던’ 연극이 감췄던 에너지를 ‘빛’으로 방출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을 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오는 5월 프랑스 오를레앙에서도 공연한다. 27일까지, 정승길, 양동탁, 김한, 양영미 등 출연. 1644-2003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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