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사칭 회원들에 “돈 찾아라”
IT 수사팀에 단속 문의 빗발
눈치 챈 警, 두목 거주지 덮치자
“돈 줄테니 봐줘라” 부당거래도
“수사관님들, 우리 ‘딜’ 해요. 이 돈 다 가져가셔도 되고, 일부만 가져가시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셔도 되고….”
경찰청 사이버테러수사팀 수사관들이 불법 선물거래 사이트 총책 김모(42) 씨 검거를 위해 이달 초 경기 고양시에 있는 그의 집에 들이닥치자, 김 씨는 금고 안에 수북이 쌓인 5만 원권 다발을 가리키며 ‘부당거래’를 제안했다. 김 씨는 처음에는 “나는 죄가 없다, 증거를 대라”며 도박 사이트 개설·운영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지만, 수사관들이 그에게 흘러간 돈 흐름 등 증거를 하나 둘 제시하자 결국 꼬리를 내렸다. 그렇지만 그는 순순히 연행에 응하는 대신, 집 금고에 보관하고 있던 5만 원권을 120장씩 묶은 돈다발 52개(3억1200만 원)를 수사관들에게 내밀며 끊임없이 “봐달라”고 제안했다. 이 과정은 4명의 수사관이 착용한 웨어러블 카메라에 고스란히 녹화됐다.
그가 경찰에 덜미를 잡힌 것은 조직원 조모(40) 씨의 배신 때문이었다.
대학까지 나오고 한때 사법고시까지 준비해 조직 내 ‘엘리트’인 조 씨는 고졸인 총책 김 씨가 자신을 대놓고 무시한다는 생각에 조직을 뛰쳐나왔고, 경찰을 이용한 복수를 다짐했다. 이후 조 씨는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조직도를 살펴보다 ‘IT금융범죄수사팀(현 사이버테러수사팀)’이라는 부서가 있는 것을 알고, 지난해 10월 김 씨의 불법선물거래 사이트에 가입한 회원들에게 “경찰청 IT금융범죄수사팀입니다. ○○사이트가 단속됐으니 전액 출금하세요”라는 문자메시지·이메일 1000여 건을 발송했다. 발송한 문자와 이메일에는 수사팀 사무실 전화번호를 기재했다. 이후 수사팀에는 단속 사실을 확인하려는 사이트 회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하루에 몇 통씩 전화를 받은 수사관들은 화가 치밀었다. 불법 도박을 한 사람들이 경찰 최상위 조직인 경찰청에 대담하게 전화를 걸어 불법 사이트 단속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수사팀은 이 사건을 일선 경찰서에 넘기지 않고, 직접 수사했다. 수사팀은 다른 사건을 처리하는 도중 틈틈이 짬을 내 5개월간 서버와 자금 이동 내역을 추적해 문자메시지와 이메일 발송자를 확인했다. 메시지에 언급된 사이트는 코스피 200지수와 연동해 지수 등락을 예측하고 그에 따라 돈을 걸게 하는 불법 선물거래 사이트였다.
경찰 수사 결과, 김 씨 등은 2014년 10월 이 사이트를 만든 뒤, 회원들로부터 투자금을 입금받아 최근까지 145억 원대 판돈을 굴리면서 고객의 투자 손실금과 수수료로 46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것으로 조사됐다. 김 씨는 선물 도박사이트 운영 전력이 있는 이모(35) 씨를 끌어들이고 고객센터 상담원도 채용하는 등 조직을 갖췄다. 합법으로 증권방송 사이트를 만들고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내세운 뒤 이를 매개로 도박 회원을 끌어모았다. 이 사이트의 한 회원은 5000만 원가량 손해를 보고 목숨을 끊기도 했다.
경찰청 사이버범죄대응과는 불법 선물거래 사이트 운영 일당 20명을 붙잡아 도박개장 혐의로 총책 김 씨 등 2명을 구속하고, 18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21일 밝혔다.
손기은 기자 s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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