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직 / 편집국 부국장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했던 지난 1월 6일, ‘핵실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나선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날 북한 풍계리 인근에서 인공지진이 감지된 지 30여 분 만인 오전 11시 “북한의 핵실험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 뒤 오전 11시 44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주재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이어 북핵 실험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난 성명이 발표된 건 낮 12시 50분이었다.

반면 같은 날 청와대 NSC 상임위원회가 소집된 시간은 낮 12시,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하는 NSC가 열린 시간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정작 북한과 정전(停戰) 상태로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우리보다 일본의 북핵 대응이 더 신속하고 긴박하게 진행된 건 일본이 북핵을 그만큼 심각한 국가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북한 핵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위치해 있다. 북한이 야전에 배치하고 있는 사정거리 1300㎞인 노동미사일이나 사정거리 3000㎞ 이상의 중거리 무수단 미사일은 핵무기를 탑재해 일본을 공격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핵폭탄 공격을 받은 유일한 국가로서 일본이 느끼는 핵 공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수도 있다.

국제사회에서 공통의 안보 위협을 가진 국가들 간에는 군사동맹을 맺는 게 일반적이다. 동맹은 친한 나라가 아니라 ‘공통의 적’ 앞에서 맺는다는 건 국제정치학의 ABC다. 미국과 소련은 추구하는 이념도 달랐고 서로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나치 독일, 군국 일본에 함께 맞서기 위해 동맹이 되어 2차 세계대전을 함께 치렀다. 체제의 운명을 걸고 핵무장을 향해 나가고 있는 북한이 조만간 핵 실전배치를 완료할 경우 핵 협박의 제1 타깃은 한국과 일본이 될 것이다.

북핵 위협에 동시에 노출돼 있는 한국과 일본 간 ‘동병상련’ 입장에서 군사동맹을 맺거나 보다 적극적인 안보협력을 꾀하는 게 상식일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과거사로 인한 한·일 양국 간 뿌리 깊은 상호 불신과 적대의식 때문이다. 지난 18일만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독도 도발 확대와 위안부 관련 책임 회피성 기술 등의 내용을 담은 고교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킨 데 대해 우리 외교부는 이를 규탄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같은 날 새벽 북한이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탄도미사일을 동해상으로 발사하는 추가 도발을 했지만, 정작 한·일 간 북핵 공조는 역사 교과서 갈등에 눌려 명함도 못 내미는 처지가 됐다.

문제는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이 북핵에 대응한 한·미·일 공조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한·미 동맹은 현재는 물론 미래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에 사활적인 전략자산이다. 그런데 한·미·일 동맹 구조 아래서 움직이는 한·미 동맹이 차질을 빚지 않으려면 기지와 물자 제공을 포함한 일본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선 3국 군대 간의 정보공유와 역할 분담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도 상호군수지원협정은 물론이고, 이미 26개국과 맺은 군사정보보호협정조차 일본과는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한·일 안보협력 강화가 자칫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야심에 멍석을 깔아줄 가능성이 있다는 일각의 우려는 지나친 논리 비약이다.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잡는 일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한·일 간 과거사 해결 없이 안보협력 없다”는 식의 대응은 무책임한 일이다. 국민감정이 문제라면 정부가 나서 설득해야 한다. 70여 년 전 사망자만 3000만 명에 달하는 참혹한 태평양전쟁을 치렀던 미국과 일본이 현재는 가장 강력한 동맹 관계로 변한 게 국제정치 현실이다.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으며, 국가이익에 보탬이 된다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국가 생존을 위협하는 북핵 위기 앞에서 지나치게 감정만 앞세운 한·일 관계는 경계해야 한다.

양측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한·미·일 동맹에 균열이 생길 경우 누구에게 해가 되고, 누가 좋아할지 자명하다. 워싱턴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북한의 핵 실전배치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한·일 정상이 과거사에 짓눌려 금기시해온 한·일 간 안보협력 방안의 새로운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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