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과거 5·16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질 때,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했던 말로 유명하다. 그런데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가 지난 21일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이 제시한 비례대표 명단이 당 중앙위원회에서 뒤집어진 데 대한 반응이었다. 제1야당의 붕괴 위기 상황에서 해결사로 영입된 김 대표는 특유의 정치적 감각과 뚝심으로 야당의 겉모습을 일부 바꿔놓았지만 기득권 결집체인 중앙위의 ‘반란’에 직면한 것이다. 5·16 이후 정치 격변기의 야당 상황을 목격했던 김 대표의 이 말은 ‘정치적 실력 행사’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자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김 대표의 최종 선택이 주목된다.
김 대표가 야당에 참여한 명분은 ‘친노(親盧) 운동권 패권주의를 청산하고 수권정당으로 당 체질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당시 더민주는 친노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안철수 의원 등 비노계가 대거 탈당하면서 양분(兩分)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때 문재인 대표가 사퇴하고 김종인 비상체제가 들어서는 바람에 더 이상의 탈당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뒤 김 대표는 햇볕정책 수정론, 북한 궤멸론, 노조 쇄신론을 내세우며 ‘친노·운동권당(黨)’ 탈피 노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지역구 공천 결과를 보면, 고참 친노와 막말 의원 몇 명을 탈락시켰을 뿐이다. 이에 김 대표는 비례대표 당선권에 전문가 그룹을 공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당의 진짜 주인이 친노 운동권임이 만천하에 확인된 순간이었다. 결국 더민주 주류 측은 김 대표를 당 붕괴 방지 및 껄끄러운 몇몇 의원들에 대한 차도살인(借刀殺人)용으로 활용한 셈이다. 김 대표는 언제든 토사구팽(兎死狗烹)될 신세인 것이다.
이런 전말을 돌아보면, 친노·운동권 세력의 본색이 총선 이전에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자칫 ‘김종인 분칠’로 총선을 치렀다면 많은 국민이 헷갈렸거나 속았을 것이다. 김 대표는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더민주의 근본을 바꿀 자신이 없다면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 계속 남아 있으려면 운동권 노선과 세력이 교체될 것이라는 확신을 국민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친노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진짜 ‘노욕(老慾)’으로 비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