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수학여행 갔던 때의 일이다. 난생처음으로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나는 여행이었고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곳으로의 여행이라 잔뜩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완행열차를 10시간 넘게 타고 간 수학여행은 기대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제일 먼저 여관에 도착했는데 시설도 형편없었지만, 그보다 신기한 것은 식사였다. 한 상 가득하게 음식이 나오는데 정작 먹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식성 좋은 중학생들이었지만 음식들을 그대로 남겼다. 다음 식사 때에도 똑같은 음식이 나오자 나왔던 게 다시 나온다고 하여 음식들을 한 데 섞어 반납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종류는 많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정작 먹을 게 없는 음식을 ‘여관집 음식’이라고 하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몇 군데 유적지를 가봤지만, 당시만 해도 관리가 너무 허술해 이 유적들을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묘사한 교과서에 대해 회의를 느낄 정도였다.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선생님들이 수학여행에서 남은 것이라며 돈을 분배하는 이상한 장면도 목격했다. 친구들도 수학여행 기간 내내 흡연, 음주, 도박, 친구 괴롭히기 등 평소 학교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못된 짓을 했다. 선생님, 친구, 교과서, 문화재 등의 실상이 평소 배우고 듣고 느낀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음을 깨닫는, 다른 의미에서 값진 ‘수학’여행이기는 했다.
이제 우여곡절 끝에 제20대 국회를 향한 대진표가 확정됐다. 이번 공천 과정을 보면서 중학생 시절 수학여행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에도 공천이 다 그랬다고 하지만, 이번처럼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막가파식 공천으로 국민을 실망시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대 정당들의 공천은 청소년 유해(有害) 공천으로 지정해야 할 만큼 막장으로 치달았다.
흔히 막장드라마를 비판할 때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probability)이 없는 황당한 사건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공천은 민주 법치국가에서 발생할 개연성은커녕 가능성(possibility)조차 없다고 믿었던 일들이 일어났다. 시대를 역행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막장드라마 작가들이 배워야 할 점을 많이 제공한 공로는 인정되지만, 이번 공천은 공천(公薦) 아닌 사천(私薦), 공천(空薦)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국가를 건설했던 근대 사상가들이 우리의 공천 과정을 본다면 그것이 국민의 의사를 실현하는 입법부를 구성하는 한 과정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공천 확정자들을 보면 가짓수는 많지만 먹을 게 없는 여관집 음식이 연상된다. 선거는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라지만, 이번엔 차선이 아니라 차악(次惡)을 선택해야 하는 선거가 될지도 모르겠다. 밥상을 뒤엎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런 심정인데, 누군가 이번에 누구에게 투표할 것이냐고 물어왔다. 우리 지역구는 특정 정당 후보가 당선될 게 뻔한데 뭐하러 투표하느냐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당투표라도 할 수 있지 않으냐는 말이 되돌아왔다. 갑자기 창피해졌다. 너무 일찍 포기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다! 아무리 여관집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게 있게 마련이다. 정치권이 혼탁할수록 국민이 나서야 한다. 정치적 무관심의 그늘에서는 부정·부패의 곰팡이들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이번에도 숨어 있는 보석이 많다. 이런 보석들에게 봉사의 기회를 주고 나아가 정치를 주도할 수 있도록 지도 편달하는 게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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