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프라이어(Martin Fryer·59) 주한 영국문화원장은 개방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2013년 9월 영국 문화를 알릴 목적으로 한국에 왔지만, 이에 앞서 우리나라 문화부터 깊숙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특히 한국의 문학·건축·음식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황석영’ ‘고은’을 정확한 한국식 발음으로 얘기했고, 한 달에 두세 번은 시청역 인근 콩국수 맛집을 찾아 걸쭉한 콩국을 마신다고 했다. 또 평양냉면집을 찾아 툭툭 끊어지는 메밀면을 자주 먹는다고 했다.
프라이어 원장은 또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취미가 뭐냐’는 뻔한 질문에 “나는 주말마다 ‘도시 탐험(city explore)’을 한다”는 뻔하지 않은 대답을 내놨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는 서울을 “과거와 현재가 ‘다이내믹한 충돌’을 일으키는 곳”으로 정의했다. 그는 청계천 일대를 자주 찾는데, 낡은 공구상가와 최신식 건물 1층에 모던한 인테리어로 치장된 카페가 공존하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했다. 그는 “급격히 발전한 한국의 현대사에 따른 현상으로 보이는데, 매우 흥미롭고 몇 번이고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라고 말했다.
프라이어 원장은 지난 24일 서울 중구 정동길 영국문화원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지난 1년 반 동안 겪고, 배우고, 느낀 ‘한국 얘기’들로 빽빽하게 채웠다. 영국문화원장에게 영국과 관련된 얘기를 길게 듣지 못하는 게 섭섭할 정도였다.
―영국문화원과 영국문화원장이 하는 일이 궁금합니다.
“영국문화원은 문화와 교육분야를 담당하는 영국의 국제기관입니다. 전 세계 110개국에 설치된 영국문화원의 가장 중요한 일은 영국 및 전 세계 사람들에게 국제적 활동 기회를 제공하고 전 세계인들 사이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주한영국문화원의 경우, 한국에서 영국의 언어와 영국 문화를 전파해서 서로 더 친숙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특히 정치나 경제처럼 딱딱한 분야 외에 예술, 교육, 언어, 과학 등 부드러운 분야에 대한 교류를 담당합니다. 전 세계 각국에서 오해와 각종 문제로 인해 많은 걱정거리가 생기고 있는데, 이런 일의 기저에는 ‘문화적 충돌’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원이 이런 충돌 가능성을 낮추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어릴 적부터 문화 전파 관련 일을 하고 싶었나요. 원래 직업은 무엇이었죠.
“처음부터 문화원에서 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1979∼80년에 말레이시아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당시 영국문화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현지 영어 선생님들을 대상으로도 영어교육을 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문화원에서 일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좋은 영어 선생이 되는 일은 정말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은 좋은 영어 선생이 되고 싶은 분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교육을 오랫동안 연구해왔고, 역사적으로 비영어권 사람들에게 영어교육을 해온 노하우도 많이 쌓여 있기 때문이죠.”
영국문화원에 대해서는 어학원을 열심히 운영하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실제 ‘영국문화원은 줄 서서 등록해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일부 학부모 사이에 퍼져 있다. 그래서 혹시 수익사업을 위해 어학원 ‘사업’에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봤다.
―영국문화원이라고 하면, 어학원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학원은 수익 사업의 일환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는 수익을 추구하는 회사가 아닌 공공 기관입니다. 이 때문에 수익 창출을 위해 어학원을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다(웃음). 어학원에서 얻는 수익은 영국문화원이 한국 내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다시 쓰이고, 문화와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 지원 등에 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국 국세로 예산 지원을 받고 있는데, 어학원 사업을 통해 자체 자금 조달을 조금씩 해나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처음에 영국문화원이 설립됐을 때, 큰 임무 중 하나가 영어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영어 교육에 대한 수요가 높기도 하고요. 현재 영국문화원 어학원이 60여 개 국에서 운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여러 국가에서 일했다. 특히 말레이시아, 태국 등 아시아국가에서 일한 경험도 많다.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그가 느끼는 한국 문화가 궁금했다. 그에게는 ‘영국신사’의 젠틀한 느낌도 분명 있지만,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곧바로 전하는 것 같아 특히 이 부분이 궁금했다.
―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한국의 특징, 인상적인 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매우 강한 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끈질기게 버텨온게 그 이유겠지요.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영향을 주변에서 받으면서 개성 있는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디자인, 건축, 의상 등 삶의 양상을 빚어내는 문화 요소들에서 상당한 개성을 지닌 것이 주목됩니다. 그런 미학적 요소들이 가족문화, 유교문화와 잘 어우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속신앙, 기독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적 요소들이 더해져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문화가 창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한국의 음식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삼면이 바다인 영향이 있는 것 같은데, 문어나 오징어와 같은 해물을 안주나 스낵으로 먹는 모습이 매우 재밌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강력한 문화권을 가진 강대국들 사이에서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도 고유한 문화를 질기게(resilient) 잘 지켜나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resilient’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구체적으로 풀이해주시면 독자들이 기사를 읽기 편할 것 같습니다.
“각종 외부 압력에 대해 질기게 잘 버텨낸다는 느낌입니다. 당장 영국문화원 직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보면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해보면, 식민화는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고유한 문화를 지켰죠. 즉, 중국이나 일본처럼 강한 문화적 특색과 국력을 가진 국가들 주변에서도 한국은 끝까지 흡수되지 않고,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온 것이지요. 이방인의 눈에는 굉장히 놀라운 일로 보입니다. 현대, 삼성, LG처럼 세계적으로 알려진 브랜드도 있습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이뤄낸 성과라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한국 음식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뭐죠.
“콩국수를 좋아합니다. 시청역 인근 콩국수 맛집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찾습니다. 처음 콩국수를 먹어봤을 때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생전 처음 느끼는 맛이었습니다. 특히 콩국수의 걸쭉한 느낌이 좋아요. 저는 수프를 좋아하는데, 콩국수에서 그런 맛이 납니다. 아마 워낙 손님이 많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콩국수 집 주인이 저를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또 평양냉면도 좋아합니다. 냉면은 한국식 패스트푸드 같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자주 가는 평양냉면집이 있는데, 매우 저렴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건축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인상적인 한국 건축물은 어떤 게 있나요.
“조선시대 건축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한국식 기와 곡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특히 저는 종묘를 좋아합니다. 이 건축물을 보면, 훈육(discipline)과 절제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단출한 삶이나 정신적 고고함을 중시하는 뿌리 깊은 유교 문화도 느낄 수 있습니다. 왕을 모셔놓은 제단마다 설치된 문, 초상, 기록들을 보면 스승과 제자, 조상과 후손이 맺은 유구한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엄숙한 순종이 떠오르죠. 이곳을 찾을 때마다 제 마음은 차분해집니다. 종묘 뒤편 산에서 언덕, 종묘 건물까지 이어지는 황홀한 조화에 저도 모르게 사색에 빠집니다.”
―주말에는 무엇을 하시죠.
‘도시 탐험’을 합니다. 전통과 현대의 맞부딪침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인들이 보여주는 가치관, 또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구세대와는 다른 욕망이 한 자리에서 맞부딪친다는 느낌입니다. 구세대는 다음 세대에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된 부의 축적, 검소함, 성실함, 책임감 등을 보여줍니다. 반면 젊은 사람들은 그에 비해 극단적으로 현대적인 서구의 음식이나 커피, 또 쉽게 새로운 것으로 갈아타는 소비문화를 보여주죠. 그런 장면들을 서울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급격한 발전이 만들어낸 재미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제를 셰익스피어로 돌려봤다. 영국문화원은 현재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Shakespeare Lives’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연극, 무용에서 영화, 강연회, 전시, 온라인 강좌뿐 아니라 국내 아티스트와의 시 낭송, 웹툰, 무용극 컬래버레이션 등 각종 행사가 열린다. 정부와 관련 기관이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400주기를 열성적으로 알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 기념행사를 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4월 28일부터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했거나 그 작품에 영향을 받아 만든 영화가 상영됩니다. 한국과 영국 양국의 무용수와 배우, 작가들이 협력해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현대식으로 해석해 무대에 올릴 계획도 있습니다. 5∼6월에는 경기 용인의 에버랜드 로즈가든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셰익스피어 400주기를 맞아 로즈가든이 셰익스피어를 테마로 꾸며지는 것이죠. 셰익스피어 작품에 장미가 많이 나오는데, 셰익스피어는 장미를 사랑의 아름다움과 고통,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보여주는 문학적 상징으로 즐겨 사용했습니다. 오셔서 즐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손기은 기자 s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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