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호철이 30일 강원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다. 휴전선 철책 너머로 금강산이 보인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동원된 이호철은 경북 울진까지 내려갔다가 국군에 포로로 잡혀 이 동해안 길을 따라 북상했다. 운 좋게 풀려난 그는 그해 겨울 흥남철수 직전 원산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소설가 이호철이 30일 강원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다. 휴전선 철책 너머로 금강산이 보인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동원된 이호철은 경북 울진까지 내려갔다가 국군에 포로로 잡혀 이 동해안 길을 따라 북상했다. 운 좋게 풀려난 그는 그해 겨울 흥남철수 직전 원산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32) 이호철 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의 배경 강원 고성

1984년부터 1996년까지 10년여간에 걸쳐 띄엄띄엄 써냈던 이 연작 장편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은, 내가 1955년 24세 때 단편소설 ‘탈향’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처음 데뷔한 뒤 20년이 지난 53세부터 65세까지, 소설 쓰기에는 가장 무르익었던 한창나이에 써낸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1980년대도 중엽에 들어 ‘세 원형 소묘’(1983) ‘남에서 온 사람들’(1984) ‘칠흑 어둠 속 질주’(1985) ‘변혁 속의 사람들’(1987) ‘헌병 소사(小史)’(1996) ‘남녘사람 북녘사람’(1996) 등을 잇달아 10년여에 걸쳐 써내어 이 작품들이 한 묶음으로 1996년에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됐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이 단행본을 처음 출간했을 때 문학평론가 정호웅 교수는 ‘칠흑 어둠 속에서 솟아난 통일의 전언(傳言)’이란 제목으로 그 책 말미에 해설을 써 주면서 그 첫 문장을, “캄캄, 칠흑의 어둠 속에서 놀라운 문학이 솟아올랐다. 원로 작가 이호철 선생의 ‘남녘사람 북녘사람’이다. 열아홉 살의 어린 인민군 병사로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채찍질에 떠밀려 죽음의 불안과 정체 모를 혼돈 속을 허우적거리며 지나쳤던 저 태백 준령의 봉우리들과도 같은 작품들을 잇대어 엮어 아무도 증언하지 않은(못한) 한 시기 특수한 체험을 되살려 내었다”라고 시작했고 잇대어 그 교수는, “바로 이 증언은, 인민군 병사로서의 실제 참전이라는 희귀한 체험이어서 그 어떤 비판도 이겨낼 수 있는 객관성을 담보해내고 있으며 이 앞에서 독자는 단지 숨을 죽인 채 귀와 눈을 양껏 열어 반 세기가 넘어 저쪽에서 다가오는 그 귀중한 역사의 증거들을 정성껏 맞아들여야 할 뿐이다”라고 쓰고 있었다.

실제로 이 연작소설은 나 자신이 1950년 7월 7일 북한에서 고교 3학년 소년으로 인민군에 동원돼 처음 얼마 동안은 그 무렵 남쪽에서 의용군으로 갓 올라온 분들을 관리하기도 하면서 서울대 영문과 학생이던 장세운, 그이의 친구였던 부산 수산대 학생이던 장서경 그리고 경동 중학생이었다던 김정현 등등은 이 소설에서도 본이름 그대로 써서 혹여 이 소설을 읽은 그 친족들에게서 연락이라도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도 나는 가졌었다. 그 기대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65년이란 세월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혹여나 싶어 기다리고는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공간은 바로 현 북한의 원산(元山)에서 시작해 안변(安邊), 오계, 상음을 거쳐 흡곡, 송전, 패천, 통천, 금강산 곁의 고성(高城)을 지나 오늘의 남한 쪽인 간성(현재 고성에 편입), 속초, 양양, 인구, 주문진, 강릉, 삼척, 울진까지의 그 기가 막힌 우리네 으뜸가는 동해안 길이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이 길, 원산에서 고성까지의 300리 길과 다시 그 고성에서 강릉까지의 300리 해안 길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일컬어져 오고도 있다.

결국은 그렇게 그 해 8월 중순에 안변역에서 밤 기차(화차 칸)로 고성까지 가서 그다음부터는 미군 비행기 공격을 피해 밤에만 걸어서, 8월 26일에야 울진에 가 닿았었다가 꼭 그 한 달 뒤인 추석 날 9월 26일에는 국방군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올라와 나는 인민군 패잔병 신세로 떨어져서 이튿날 27일에는 어느새 혼자서만 태백산맥 서쪽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오대산 입구 월정사에서 안변으로부터 떠날 때의 동료였던 노자순을 만난다.

그때 그이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3의 열아홉 살.

그이의 집이 양양 쪽이라서 그렇게 오대산을 비롯, 태백산맥 깊은 산속을 허위허위 올라가 양양의 정족산까지 이틀간에 걸쳐 그 노자순과 같이 다시 북상(北上), 9월 30일에는 양양 수리 뒤 정족산의 ‘큰 바위’에까지 이른다.

그 ‘큰 바위’에서 사흘을 같이 지내고, 그이 왈(曰), 자기는 그 어간에 북한 체제 속에서 빨갱이로 살았으니 지금 내 집에 내려가본들 다시 잡혀서 곤혹(困惑)이나 치를 터이니 자기는 이대로 강릉이나 삼척 쪽으로 내려가 일꾼 살이나 하련다. 하지만 지금 원체 국방군이 신바람 나게 북상(北上) 중이어서 자네 같은 학생 출신 인민군들은 그냥 모두 각자대로 자기 집으로들 돌아가라고 한다니까 그냥 혼자서만 내려가 보라며 이 자리서 헤어지자고 해 나는 혼자서만 그 긴 아름다운 수리 골짜기 길을 내려와 양양 남대천 가에서 국방군 포로로 잡혀 현지 주둔 헌병대에 넘겨졌다.

바로 이 소설은 이런 내 경험들이 고스란히 사실 그대로 펼쳐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의 공간은 통째로 그 전체가 원산에서부터 울진까지의 동해안 길이요, 그 공간인 것이다.

원산서 고성이 우리 이수로 300리, 고성서 강릉이 300리. 그리고 강릉서 울진까지의 공간인 것이다.

그때의 고성 거리는 강릉만 한 큰 거리였는데 지금은 그 서쪽의 철원(鐵原)과 함께 휴전선 한가운데여서 허허벌판의 황량한 공간으로만 남아 있다.

그렇게 국방군에 포로로 잡혀서는 헌병대에서 첫 조사를 받은 뒤 양양 경찰서 유치장에 다른 인민군 포로 여럿과 함께 갇혀있다가 스리쿼터 편으로 강릉으로 압송됐으나 부산으로 가는 배편이 없고, 더구나 삼척 근처 언덕에는 인민군 패거리들이 우글우글해 어쩔 수 없이 국방군 헌병들에게 이끌려서 다시 걸어서 북상을 하게 된다. 말인즉, 주문진이나 속초에 가서 부산행 배편을 알아보라는 것이었는데 이 전시(戰時)에 그런 배가 호락호락 있을 것인가.

어쩌면 이대로 원산까지 걸어 올라가게 될는지도 몰랐다. 이건 그 훨씬 뒤에 알게 됐지만 실제로 그 포로들은 원산까지 걸어 올라가 그곳에서 배편으로 부산까지 가 닿아 포로수용소에 들게 됐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그 동해안 길을 강릉에서부터 국군 헌병들의 옹위(擁衛)하에 포로 상태로 북상 길에 들어서 매일 10여 ㎞씩 두어 달 전과 그 똑같은 길을 역시 걸어서 며칠 동안을 두 번째로 북상해 가던 중에 그 한 달 전에는 오른쪽으로 태백산맥이 있어서 밤중의 걸음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대낮 길이어서 태백산맥의 그 위용(偉容)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왼쪽은 우람한 태백산맥의 모습 그리고 오른쪽은 짙푸른 동해바다! 그 바닷소리!!!

아아, 그 공간, 살아 숨 쉬던 우리네 산천과 공간!! 공간!!!

아아, 그때 그런 지경으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서쪽으로 보이는 태백산맥 능선의 그 아름다움은 기가 막혔다.

특히 아침나절 해 떠오를 무렵의 그 찬연(燦然)한 모습 그리고 저녁 해질 무렵의 장엄한 모습, 그건 그로부터 65년이 지났음에도 바로 어제 겪은 것처럼 선연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바로 이 소설은, 그때 내가 직접 겪었던 이런 경험들이 고스란히 죄다 그대로 살아있는 산천(山川) 공간으로 펼쳐진다.

바로 이때 내가 직접 겪었던 이생 체험은, 이 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뿐만 아니라 내 단편소설 중의 가장 으뜸으로 해외에서도 평가되고 있는 ‘나상’의 무대도 바로 같은 이 동해안 공간이었음을 아울러 이 자리서 덧붙여 둔다.

65년 전인 1950년 고3으로 인민군에 동원되던 그 7월 7일이라는 날짜와 그 뒤의 울진 거리에 가 닿았던 날짜, 그 해, 추석 날 후퇴했던 날짜들, 그렇게 겪었던 그 산천 공간까지도 나는 이날 이때까지 구석구석 그대로 죄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2000년대로 접어들어 일본어판으로 나오면서 그 표지 띠에 ‘한국전쟁 시에 북과 남 두 체제를 살아냈던 작가가 통일에의 지향을 담아낸 장편소설’이라고 적고 우리네 산천을 그대로 특기해 보여주며 ‘대한민국예술원상, 대산문학상 수상!’이라고도 썼다. 계량경제학자인 영국 런던 대학의 일본인 명예교수 모리시마 미치오(森島通夫)는 일본 신초샤(新潮社)에서 번역 출간되었던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독후감을 보내왔다. “‘남녘사람 북녘사람’을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그 중의 ‘변혁 속의 사람들’은 초기 북한 사회의 변해가던 정경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남과 북이 사이 좋게 지낼 조건인 것 같음에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점이 무척 아쉽군요. 당신과는 꼭 한번 만나보고 싶지만 원체 나이가 나이라서 선뜻 용기를 낼 수는 없군요. 일본으로 돌아갈 길에 한번 서울행을 시도해 보기는 하겠습니다마는…”이라고 일본어 친필 편지를 보내오긴 했었지만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물론 지금쯤은 이미 그이도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다.

이 소설의 무대와 공간이 그렇게 우리네 아름다운 동해안, 웅장한 태백산이 가까운 거리에 보였던 공간이었듯, 비록 몸은 영국 런던에 있었던 그 일본인 교수도 바로 이 소설을 통해서는 이 한국 땅에 살고 있는 나와도 아주 지근(至近)거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 점으로 보더라도 문학으로 이야기되는 공간 개념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오묘한 것이 아니겠는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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