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알’이라는 순 우리말이 있다. ‘성미나 자존심, 또는 자기만의 생각이 자리 잡은 가상의 처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 사전적 정의다. 오늘날은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일이 만족스럽지 않고 눈꼴사납게 느껴질 때 흔히 ‘배알이 꼬인다’ ‘배알이 뒤틀린다’고 하거나 누군가 상대에게 굴욕적인 처우를 당하고도 가만 있는 경우 ‘배알도 없는 사람’이라는 식의 표현을 쓰곤 한다. 이처럼 배알은 있고/없고, 꼬이고/뒤틀리고 하는 등 어떤 실체가 분명한 현상이지만, 이를 ‘가상의 처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 것은 그만큼 배알의 작용범위가 넓고 상황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배알’이란 복강(腹腔·배 속)에 존재하는 신경절(ganglion)들의 기능적 연결망을 의미한다. 인간의 내장(內臟)은 수억 개의 신경세포로 둘러싸여 있으며, 척수 전체보다 더 많은 뉴런(neuron·신경계의 구조적·기능적 단위인 신경세포)들이 배 속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기분이나 감정의 변화에 따라 체내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신경전달 물질들은 머리가 아니라 배 속에서부터 먼저 합성되고 저장·방출된다. 최근 들어 서구의학계에서 배 속을 이른바 ‘제2의 뇌’라고 부르는 까닭 역시 배 속에 존재하는 뉴런들의 세포 형태, 작용물질, 수용기(receptor) 등이 ‘머릿속 뇌’인 두뇌가 지닌 것들과 같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동의생리학에서는 이러한 구조기능 체계를 삼초(三焦)라고 한다.

배알이 편안해야 머리도 잘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배 속 신경망들의 구성과 결합 상태가 원활하지 못해 감정이 안정되지 않으면, 이성 또한 그만큼 왜곡되고 거칠어져 정교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이성적 판단은 감정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그 효력을 발휘한다. 감정이 안정되어 있으면 어떤 판단이든 쉽게 할 수 있다. 해야 하는 건 하고, 안 해야 하는 건 안 하면 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해야 하는 일인데 그대로 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데 안 하고 넘어가자니 괜히 억울하고, 이런 상황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판단과 행동이 자꾸 복잡해지는 것이다. 이를 ‘삼초가 결독지관(決瀆之官)이요, 수도출언(水道出焉)한다’고 한다.

결독이란 인간이 어떤 (이성적 모양새로 드러나는) 구체적 사고·판단·행위를 하기 이전에 이미 감정적으로 모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우리의 인간관계를 보면, 한 번 상대를 믿고 좋아하게 되었을 때, 마치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그 사람과의 모든 관계망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한 번 마음이 열리면 허용할 수 있는 이성적 경우의 수가 확연하게 많아진다.

요컨대 인간이 쓰는 이성적 판단이란 대개 내가 좋아하는 만큼 잘 하려 하고, 내가 싫어하는 만큼 못 하는 것이다.

둑을 많이 열면 신체 내적으로든 인간관계에서든 안팎으로 물(水道)이 콸콸 흘러나갈 것이고, 반대로 스스로 감정의 둑을 막아버리면 수로(水路)가 차단되는 만큼 나와 상대와의 관계 또한 단절되어 갈 것이다. 신경전달망이 주변으로 넓게 연결되지 못하고 특정 부위에만 갇혀 메말라가고 있는 상태를 흔히 초조(焦燥)하다고 한다. 사회 전체가 초조함에 시달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유와 포용이 넘치는 인간관계망의 재구축일 것이다.

카페방하 디렉터 lee_sy@egonec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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