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전윤희가 부드럽게 물었다. 오전 11시, 오늘은 한랜드에서 입을 파카와 부츠를 사려고 외출 준비를 하다가 이민기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이민기는 ‘사람’ 극단의 간판스타로 연극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네, 그런데요….”
이민기의 굵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달콤한 목소리다. 나이가 세 살 연하지만 전윤희는 한때 이민기를 애인으로 삼을까 고민했었다. 그때 이민기에게 애인이 생겨서 포기했지만 그만큼 매력있는 놈이다.
“그래? 무슨 일? 가불이라면 며칠 기다려. 가기 전에 자금이 나올 것 같으니까.”
들뜬 전윤희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많이는 못 줘. 유라시아그룹 쪽에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대표님, 저희들은 못 갑니다.”
불쑥 이민기가 말했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2초쯤이 걸렸다.
“응? 못 가? 무슨 말이야?”
“감독을 바꾸셨다면서요?”
“응, 그래서?”
“저희들은 기계 부속이 아닙니다. 감독을 바꾼다면 저희들 하고 상의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봐, 이민기 씨.”
이제 전윤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솔직히 지금까지 참았지만 대표님의 독단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뭐라고? 말 다 했어?”
“전 이 감독이 없으면 한랜드 못 갑니다. 계약기간도 정하지 않았으니까 날 끌고 가지 못할 겁니다.”
“과대망상증에 빠진 것 같군.”
마침내 전윤희도 눈을 치켜떴다.
“연극을 이민기 씨 혼자서 하나? 이민기 씨 대신할 사람도 많아.”
“그러시겠죠. 그러니 하루아침에 감독을 자르고 조감독을 내세웠겠죠.”
“안 간다면 할 수 없지.”
“저만 안 가는 게 아닙니다.”
숨을 죽인 전윤희가 몸을 굳혔고 이민기의 말이 이어졌다.
“안미나, 최정윤, 조수환도 같이 안 갑니다. 이제 내 대역도 없어졌죠?”
“…….”
“그리고 무대감독 양기선, 분장 오미경, 단원 박문수, 조희성도 조금 전에 우리하고 행동을 같이 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러면 주·조연은 다 빠졌고 분장에다 주요 단원까지 제외되었다. 남은 건 엑스트라급 대여섯 명뿐이다. 극단 ‘사람’은 해체된 것이나 같다.
“아니, 정말, 도대체….”
갈라진 목소리로 전윤희가 신음하듯 말했다. 두 눈이 충혈되었고 입끝이 떨렸다.
그때 이민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유라시아그룹 쪽에 진정서를 내기로 했습니다. 그쪽도 알아야 될 테니까요.”
“이봐, 이민기!”
전윤희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이민기는 통화를 끝냈다.
“이, 개자식.”
눈을 치켜뜬 전윤희가 아직까지도 한 손에 들고 있던 빗을 내동댕이쳤다.
“이, 나쁜 년!”
저절로 전윤희의 입에서 욕이 쏟아졌다. 이미연을 욕한 것이다. 모두 이미연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분명했다. 심호흡을 세 번이나 하고 난 전윤희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윤상희의 번호를 눌렀다가 신호음이 세 번 울렸을 때 껐다. 윤상희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큰일났다. 진정서가 간다면 유라시아그룹은 계약을 취소할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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