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 총선을 한 달 반 앞둔 지난 2월 29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가 열리는 회의실 백보드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조동원 홍보본부장이 공모한 백보드 글귀는 ‘정신 차리자. 한 방에 훅 간다’는 것이었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화를 내며 당장 내리라고 했고, 일부에서도 너무 자극적이라는 말이 나오자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문구로 대체됐다.
건설업계에서 대형사고 1건이 일어나기 전에 유사한 29건의 경미한 사고가 있고, 경미한 사고 이전에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300건의 사소한 징후가 있다는 일명 ‘하인리히 법칙’이 있듯이 새누리당은 그 많은 징후를 알아채지 못하고 진짜 한 방에 훅 가버렸다. 처음에는 180석을 자신하다가 무슨 짓을 해도 과반(過半)은 가능하다는 오만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하루아침에 제1당 지위는 물론 오세훈·김문수와 같은 대권주자도 모두 잃어버렸다.
지난 2004년 탄핵 후폭풍으로 진보적 정당이 1당이 된 비정상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제1 야당이 1당이 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4당 체제하의 민정당 125석보다 적은 122석을 얻은 새누리당은 심폐소생술을 해야 할 응급환자와 같다. 막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집권 여당이 하인리히 법칙처럼 몰락을 예고한 징후가 많았음에도 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까. 거슬러 올라가면 박근혜정부 들어 실시된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 선거에서 여당이 연전연승하며 민심의 저변에 흐르는 거대한 용암과 같은 분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결정적 패착이다. 4년 차를 맞아 박 정부는 국민 앞에 마땅히 내놓을 성적표가 없다.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담뱃값을 한꺼번에 2000원 올려 서민의 복장을 터지게 하고,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고 했다가 얼마 안 돼 대출을 조이는 오락가락한 정책에서 서민들의 삶은 황폐해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전셋값에 서울을 떠난 샐러리맨들이 몇 시간씩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면서 여당에 표를 주고 싶었을까. 사흘이 멀다 하고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에게 표를 달라는 여당 후보가 예뻐 보였을까. 일자리가 없어 백수 생활을 하는 청년들이 그저 참고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만큼 민심을 읽는 시스템이 심각한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배신의 정치 심판’ ‘진실한 사람’이라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칼춤을 춘 친박(親朴)은 이번 선거 패배의 일차적인 책임자이다. 당 대표를 ‘죽여버려’라고 하는 완장 차고 호가호위하는 친박의 행태에 국민은 표로 심판했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후 친노 핵심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홈페이지에 자신들의 정치적 패배를 자인하며 ‘우리는 폐족(廢族)입니다’라고 썼다. ‘성난 사자 우리에 떨어져서 그 울부짖음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사자 우리 안에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지금이야말로 친박은 국민 앞에 폐족을 선언해야 할 때이다. 선거 때 무릎 꿇고 사과하는 쇼를 할 것이 아니라 지금 광화문 네거리에서 석고대죄해도 모자란다. 그러나 선거의 5적(敵) 중의 한 명인 이한구 전 공천관리위원장은 언론인터뷰에서 자신의 공천 실패를 불출마 선언을 하지 않은 유승민 의원과 옥새 파동을 일으킨 김무성 대표에게 떠넘기고 ‘개혁 공천’의 진정성을 몰라준 국민 탓만 했다. 패배 책임을 져야 할 신박(新朴) 원유철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고, ‘진박 감별사’를 자임한 최경환 의원은 차기 당권 출마를 노리고 있으니 여전히 민심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있는 듯하다.
새누리당은 지금 재창당 수준의 ‘육참골단’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2004년 차떼기당 오명을 벗기 위해 박 대통령이 당 대표가 된 첫날 당 현판을 떼어 들고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쳤던 그 절박함이 없다면 회생은 어렵다. 친노가 폐족을 선언하고 그래도 짧은 시간에 재건한 것은 탄탄한 하부 조직과 문재인이라는 대권주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친박이 자랑으로 여기는 박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은 이번 선거에서 균열이 났고, 이렇다 할 대권주자도 없다. 얄팍한 정치술수로 위기를 넘길 단계는 이미 지났다. 박 대통령에게 더 이상 기댈 상황도 아니다. 새누리당과 친박 스스로 기득권을 철저히 내려놓고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는 한 앞으로 다가올 실패는 더 잔인하고 가혹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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