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우 / 한양대 교수·국제정치학

1999년 8월 17일 규모 7.4의 지진이 터키 서북부 인구 밀집 지역을 강타했다. 사망 1만7000여 명, 부상 4만4000여 명에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20세기 최악의 지진 참사 중 하나였다. 비극적 재난 소식에 세계 각국이 지원을 했고, 우리나라도 구호 대열에 동참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규모 구조대와 대량의 물적 지원을 한 나라는 그리스였다. 중앙정부는 물론, 각급 지방자치단체와 다수의 비정부기구(NGO)가 구호 성금과 물품을 앞다퉈 보내는가 하면 그리스 시민의 기부와 헌혈이 줄을 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3주 후인 9월 7일 이번에는 규모 5.9의 지진이 그리스 아테네를 덮쳤다. 사망자 143명, 부상자 1만2000여 명에 도시 기반시설의 상당 부분이 파괴됐다. 이에 터키 정부는 지진 발생 후 불과 13시간 만에 구조대를 급파해 누구보다도 먼저 참사 현장에 도착하여 구호 활동에 들어갔고 뒤이어 터키 각계각층으로부터 온정이 답지했다. 쇄도하는 터키 국민의 성금과 헌혈 문의로 주(駐)터키 그리스 대사관의 전화가 불통이 될 정도였다.

이 일이 있기 전 그리스는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을 앞장서서 반대하는 나라였다. EU 차원에서 터키에 제공하려던 1억6000만 달러의 경제부흥 지원 계획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도 그리스였다. 양국은 원래 철천지원수였기 때문이다. 과거 오스만제국 시절 터키는 400년이나 그리스를 지배했고, 1970년대 이후에도 양국은 에게해(海)와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영토분쟁으로 세 차례나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앙숙 중의 앙숙이었다. 그러던 것이 두 나라에서 발생한 대재난을 계기로 양국은 상대 국민의 온정에 마음을 열었고, 구원(舊怨)을 걷어내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 개선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그리스는 더는 터키의 EU 가입을 반대하지 않게 됐고 EU의 대(對)터키 경제 지원 계획도 실행에 옮겨졌다.

그리스와 터키의 화해는 재난외교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재난을 당한 국가에 대해 신속하게 대규모 지원을 함으로써 인도주의적 구호는 물론, 이를 넘어 기존의 갈등을 순화하거나 우호 관계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재난외교다.

재난외교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재난외교가 국가 간의 해묵은 갈등을 해소해 주는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재난 피해국이 외부로부터의 지원 제공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체면 손상, 의존성 심화 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대규모 자연재해로 인한 위급한 재난 상황에서는 국가 간 갈등이 감소하고 평화와 화해의 가능성이 높아지며 협력적 관계 형성을 위한 기회의 창이 열린다고 한다. 재난외교를 통해 우호적 인식의 증진과 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 조성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지난 14일 이웃 일본의 구마모토(熊本)현에서 강진(强震)이 발생했다. 규모 6.5의 전진(前震), 7.3의 본진(本震), 그리고 크고 작은 여진(餘震)이 이어졌고 어쩌면 아직도 진행 중인지 모른다. 사망자 47명, 실종 8명, 부상자 1000여 명에 이재민은 20만 명에 이른다. 지진 피해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 음식물과 생필품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이웃 나라의 대형 재난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진 직후 외교부는 현지에 신속대응팀을 파견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지진 발생 4일 만인 18일 대통령이 위로전문을 보냈다는 짤막한 단신이 19일 조간신문에 실렸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용렬함의 극치를 보이는 악성 댓글이 떠돌고 있다.

일본 측과 사전 협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두고 볼 때 이번에는 재난외교가 완전히 실종된 느낌이다. 불편한 한·일(韓日) 관계 탓일까. 상호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을 주고받는 것이 양국 지도자들에게 정치적으로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난 현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정치적 고려란 사치일 따름이고, 장기적 외교 관계의 관점에서는 단견에 불과하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도 ‘성금’을 모으고 있다. 주는 쪽이 머뭇거리고 있었다면 주는 쪽이, 받는 쪽이 떨떠름해 하고 있었다면 그쪽이 반성할 일이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기회의 창이 닫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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