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유럽’의 여신상 유물 그림. 왼쪽부터 청동기 뱀 여신상, 자궁과 물의 생명력을 표현한 테라코타, 신의 기원을 상징하는 열린 입의 조각상, 미앤더 문양의 빈차 여신상. 한겨레 출판 제공
‘올드 유럽’의 여신상 유물 그림. 왼쪽부터 청동기 뱀 여신상, 자궁과 물의 생명력을 표현한 테라코타, 신의 기원을 상징하는 열린 입의 조각상, 미앤더 문양의 빈차 여신상. 한겨레 출판 제공
여신들을 상징하는 문양들.
여신들을 상징하는 문양들.

여신의 언어 / 마리야 김부타스 지음, 고혜경 옮김 /한겨레 출판

여신의 언어는 무엇인가. 생명을 만든 태초의 여신은 어떤 언어로 먼 시간을 건너 그 생명의 후손인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까.

남성적이고 호전적인 인도-유럽문명 이전에 여신 문명에 기초한 배려와 돌봄, 평등하고 평화로운 ‘올드 유럽(Old Europe)’이 존재했고 올드 유럽이야말로 유럽 문명의 진짜 뿌리였다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 리투아니아 출신의 독보적 여성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1921∼1994). 그에게 여신이 남긴 언어는 유럽 신석기 초기 유물에 남아 있는 문양과 상징들이었다. 다양한 상징들이 복잡하게 구성돼 있긴 하지만 내적 일관성을 따라가면 그 의미를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89년에 출간돼 세계적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찬사를 받은 역작 ‘여신의 언어’는 바로 이 작업의 결과이다.

책은 그가 기원전 7000∼3500년의 유물 2000여 점에 남아 있는 문양과 상징들을 조합·분류해 의미를 기술적으로 해석해 낸 결과물이다. 그는 올드 유럽의 유물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V, 쐐기, X, M, 미앤더(번개무늬 모양 등의 연속무늬), 그물망, 삼선 등은 단순한 기하학적 무늬가 아니라 여신의 상징, 여신의 언어라고 봤다. V 무늬가 자궁 부위의 역삼각형에서 유래했듯이 문양들 모두 여신의 젖가슴, 눈, 입과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새, 뱀, 돼지, 황소, 개구리, 고슴도치, 씨앗 등도 여신의 다양한 속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봤다.

하버드대 내 유일한 여성 고고학자였던 김부타스는 젊은 시절 당대 흐름대로 각종 무기 유물을 토대로 인류 전쟁 문화를 연구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불가피했나? 인류 문명 내내 남자가 여자를 지배했을까?” 이런 의문 속에 그는 신석기 토기 회화와 의례 용품에 등장하는 문양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고, 결국 그 문양이 여신 문명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퍼즐을 구성하는 상징들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태초의 여신이 존재했고, 이 여신은 남신의 부인이나 추앙받는 미의 여신이 아닐 뿐 아니라 대지의 여신이나 어머니 여신이라는 틀도 넘어선다고 해석했다. 생명뿐 아니라 죽음도 관장하고, 생명을 다시 탄생시키는 생명의 순환과정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믿음이다. 이에 그는 인류 초창기에 모권 사회가 존재했고 인류 역사는 모권제에서 가부장제로 넘어왔다는 일반적 인류학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인류는 오랜 시간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았고 남성 중심 문명은 긴 시간 속에서 오히려 일시적인 것이며 거기서 파생한 전쟁과 지배의 문화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봤다.

그의 연구는 그 뒤 비판도 받았다. 김종일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의 추론이 적절한 고고학적 연구 절차와 방법을 따르지 않고 직관적인 관찰에 머무르고 있으며 여성과 남성, 전쟁과 평화를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봤다는 비판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우리가 과거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단계이며, 일반인들에게 다채롭고 풍요로운 상징과 기호로 이뤄진 과거 사회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인류의 먼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펼쳐 보이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계는 우리가 갖지 못한,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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