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민주화가 역행할 수도 있다는 정치학적 역설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으로 들린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민주주의가 뒷걸음칠 수 있단 얘긴데, 특정 국가의 선거 결과에 따라 주변국이 적잖은 영향을 받는 데도 정작 주변국 국민들은 그 나라 선거에 투표권이 없음을 빗대는 표현이다.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유력시되는 도널드 트럼프가 쏟아내는 막말만 들으면 투표권이 없단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
“미군을 한국에 배치해 얻는 건 없고 돈만 낭비할 뿐”이라거나 “한국이 주한 미군 주둔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 당선 후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건 약과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더라도 알 바 아니라며 행운을 빌어줄 테니 잘 해보란다. 공화당 인사들조차 트럼프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직접 나서 무지한 후보가 백악관에 들어와선 안 된다고 일침을 놨을 정도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트럼프 후보의 선전(善戰)에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우선, 미국 시민 대다수가 정치적으로 소외됐다고 믿는 데다, 사회 전반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CNN의 여론조사는 미국인 10명 중 3명만이 자신들의 목소리가 워싱턴 정가에 제대로 반영된다고 믿는다는 결과를 내놨으며, 갤럽 역시 학교나 은행·교회 등 공공기관에 대한 미국 시민의 신뢰도가 역사상 가장 낮은 것으로 집계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런가 하면 단지 29%의 미국인만이 현재 미국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세계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일자리가 줄어 정치적 극우 성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연구 결과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2002~2010년 유권자들의 지역별 투표 행태와 실업 추이의 상관성을 분석한 한 연구는 무역역조로 인한 충격이 심한 지역일수록 극우나 극좌로 정치 성향이 이동하는 현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마린 르 펜 국민전선 대표의 인기에서 보듯 정치적 우경화는 비단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우경화는 인종차별, 군사 우월주의나 파시즘을 추구하던 과거의 극우와는 다르다. 거의 100년 만에 유럽과 미국에서 동시에 등장한 극우 성향 후보들은 기존 정치와 정당에 신뢰를 잃은 근로자들의 지지를 결집하며 정치적 스펙트럼 자체를 우경화시키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보호무역론이나 경제 민족주의와 일맥상통해 우리 대외 정책에 시사하는 바 크다.
이젠 트럼프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일단 공화당의 후보 지명을 받게 되면 다양한 외교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좌충우돌식 경거망동은 그만 자제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미군의 해외 주둔 경비 분담, 북한 등 도발 국가에 대한 강력한 군사 제재 가능성은 상존한다. 1999년부터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니 이 또한 대비해야 한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3600명만 철수시키는 선에서 자신의 ‘주한 미군 철수’ 선거 공약을 접었다. 의회와 미 군부의 줄기찬 반대 때문이었다. 선거 때마다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들의 정책을 예상하고 예비 참모진과 인맥을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미 외교의 정석은 의회와 행정부에 꾸준히 공을 들이는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외교부만 나서서 될 일도 아니고 정부와 기업은 물론, 민간도 공공외교의 최전선에서 지속 가능한 한·미 관계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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