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용 / 논설위원

전쟁 통에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적군은 총을 쏴대고 폭격까지 하며 아군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기세다. 그런데 아군은 응사할 생각은 않고 전비(戰費) 조달과 전사자 보상 궁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장기전 또는 단기전으로 갈지, 전면전 또는 국지전으로 갈지 아직 판단하기 힘든 상황인데 말이다. 육군과 공군 주력 부대는 서로 먼저 진격하라며 티격태격한다. 야전 총사령관 실체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대로 가면 필패다. 작금의 기업 구조조정이 그 꼴이다.

구조조정은 전쟁이다. 속전속결이 승전 비결이다. 어느 나라든 그 수순이 ‘선(先) 구조조정-후(後) 2차 파고(波高) 대응’인 이유다. 그래야 후유증도 줄고 재발도 없다. ‘한국판’ 구조조정은 본말이 완전히 전도됐다.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느니, 실업 대책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느니, 부실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느니 등으로 갑론을박하다 날이 샌다. 죽었다 깨어나도 구조조정이 성사될 리 없다. 오죽하면 한 경제학자는 “세상에 이런 구조조정은 처음 봤다”고 했을까.

왜 구조조정은 전광석화처럼 해야 할까. 이에 답을 주는 일화가 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2011년 1월 부실 저축은행 정리에 전격 착수했다. 취임 직후 작심한 지 2주일 만이다. ‘작전계획’이 외부에 알려지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판단에 청와대에 사전 보고도 하지 않았다. 영업정지 의결을 위한 금융위 소집 30분 전에 청와대에 전화로 “오늘부터 저축은행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알렸을 뿐이다. 이후 저축은행 총자산 100조 원 중 46조 원을 단번에 정리했다. 시장이 출렁대자 비난의 화살이 날아올까 겁에 질린 정치권도 재원 마련을 위한 관련법 개정에 호응했다.

그의 말은 지금 복기해도 심장(深長)하다. “관(官)이 아무 때나 치(治)하면 천박한 관치다. 시장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만 치한다. 그리고 일단 관이 나섰으면 확실한 해결사가 돼야 함은 물론이다.”

구조조정 책임의 종착역은 국민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정부다. 기업과 채권단, 정치권은 그다음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전문가들은 세계 경제가 기나긴 침체기로 들어선다고 입을 모았다. 근인(根因)이 부채였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잦아지자 미국 등 선진국 정부는 집 안에 틀어박혀 지붕도 단단히 묶고 창틀도 교체하고 몸도 만들었다. 반면 우리는 여기저기 기웃대다 집 안은 엉망이 됐고 건강도 많이 상했다. 급기야 조선·해운·건설·철강·석유화학 업종 기업들이 줄줄이 수술실로 실려 갔다. 대우조선해양은 인공호흡기를 낀 채 연명(延命)치료 중이다. 근 20년간 6조5000억 원의 국민 혈세가 투입됐는데도 회복은커녕 병세만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영업 손실만 5조5000억 원, 부채 비율도 7300%에 달한다. 갑갑하고 울화가 치밀 뿐이다.

4·13 총선 때 불쑥 나온 ‘한국형 양적완화’는 꼬인 구조조정 스텝을 더 뒤틀어놨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말대로라면 이 정책은 특정 목적으로 특정 부문에 지원하는 정책금융 정도의 ‘가본 길’이다. 마냥 돈을 풀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미국·일본식 양적완화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대단한 통화정책인 양 작명이 포장돼 구조조정에 발을 안 담그려는 한국은행에 핑곗거리만 되고 있다. 일부 학자와 정치권은 물론 대통령마저 이 용어를 혼동해 사용한다. 그러니 실체 없는 논쟁만 난무하고 오해로 인한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선거용 양적완화 용어는 폐기돼야 한다.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구조조정 주도권도 잃었다. 정치권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밤 놔라 배 놔라 한다. 부실기업에 부실 산업까지 손대야 하는 만큼 그 셈법도 복잡다기해졌다. 채권단의 상시 구조조정과 금융위원장 주도로 해결할 단계는 한참 지났다.

이제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전쟁의 최선두(最先頭)에 서야 한다. 구조조정협의체도 직접 주재해야 한다. 매 순간 비장한 각오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대통령도 부총리에게 절대적인 힘을 실어줘야 한다. 장관들도 손에 피 안 묻히려 하지 말고 온몸을 내던져야 한다. 한은도 숨어만 있지 말고 후방에서 지원 사격에 적극 나서야 한다. 여야정도 합심(合心)해야 한다. 전쟁은 터졌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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