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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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⑬ 成心과 虛心

오늘날 소통(疏通)이 시대의 담론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통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전개된다. 그럼에도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소통을 전공하는 학자 입장에선 안타까울 뿐이다. 소통의 중요성만 강조될 뿐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론이 생략돼서이다. 소통이 잘 이뤄지면 굳이 소통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소통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클수록

우리 사회에 불통이 지배한다는 논리가 역설적으로 성립한다. 그렇다면 소통을 어떻게 해야 말만 무성한 지금의 소통 담론을 우리 주위에서 없어지게 할 것인가? 소통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서양의 대표적인 학자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J 하버마스를 들 수 있다. 그가 창안한 커뮤니케이션이론(communication theory)은 지난 50년 가까이 서양의 사회과학계를 꾸준히 지배해 왔을 정도로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설명력이 높은 이론이다. 이 이론은 우리의 사회과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관련 학자들에 의해 가장 빈번하게 인용됐던 이론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나라 시민사회 운동도 하버마스 이론이 그 출발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버마스 커뮤니케이션이론은 현대사회의 정당성(legitimacy) 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현대사회 위기는 체계(system)와 생활세계(life-world)가 분리되면서 생겨나고, 또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하면서 더욱 증폭됐다. 이는 체계를 조종하는 화폐와 권력이 생활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합리성을 복원하여 화폐와 권력에 의해 조종되는 체계의 목적합리성을 극복할 때 현대사회는 정당성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복원된 대표적 생활세계의 모델로 시민적 공론장(公論場)을 들었다.

하버마스의 이런 시도는 후기 자본주의사회 분석에서 오랫동안 지배적 위치를 향유해 왔던 마르크스적 ‘노동’ 개념을 ‘커뮤니케이션’ 개념으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소통과 관련지을 때 그의 커뮤니케이션이론은 절반의 완성이다. 그는 참여자들이 의사소통적(communicative)·주장적(constantive)·표현적(representative)·규제적(regulative) 언술 행위를 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했는데 이 해법이 너무나 도식적이어서이다. 사실 이런 언술 행위를 할 줄 몰라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버마스는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때 한국사회 문제들에 대한 진단 및 처방을 부탁받는 자리에서 “명륜당과 해인사에 모든 답이 있는데 굳이 내 철학을 통해 한국사회를 연구하려느냐?”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이 발언은 한국 학자들을 위한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체류하는 동안 유가와 불가를 접했을 때 받았던 충격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버마스가 그 당시 장자를 접했더라면 장자 사상이 소통 해법의 진수라고 말했으리라 상상해 본다. 만약 그렇게 말했더라면 그는 자신의 커뮤니케이션이론에서 부족한 부분을 분명 장자에서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제시하는 소통의 해법은 무엇인가? ‘소요유’ 대붕(大鵬)의 비상에서 보듯이 대붕처럼 한 단계 더 높거나, 더 먼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물론이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이나 생각도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이때 타협은 물론이고, 소통의 가능성까지 열린다. 그래서 장자는 한 단계 더 높거나, 더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을 큰 지혜(大知)와 큰 말(大言)로, 또 한 단계 더 낮거나 더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것을 작은 지혜(小知)와 작은 말(小言)로 규정한 바 있다.



성심(成心)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으면 어느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현자(賢者)만이 어찌 스승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愚者)에게도 스승이 있다.

성심을 스승으로 삼지 않는데 시비(是非)가 생겨나면 오늘 월(越)나라로 떠났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말이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다고 하는 일종의 궤변이다.

이런 궤변은 신령스러운 지혜를 지닌 우(禹)임금조차 이해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를 알겠는가?



이것이 ‘제물론’에서 제시된 장자의 두 번째 소통 해법이다. 성심이란 ‘이룬 마음’인데 이는 각자가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마음이다. 사람마다 모두 이룬 마음이 있어 이것이 불통(不通)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장자는 이룬 마음 그 자체를 불통의 원인으로 삼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누구나 다 이룬 마음을 지닌다는 현실을 수용해서이다. 장자가 문제시하는 건 이룬 마음을 각자의 스승(師)으로 삼는 태도다. 이룬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각자의 의견을 절대시하면서 타협은 고사하고, 소통의 가능성마저 없애기 때문이다.

사실 부모와 자식 간의 불통도 따지고 보면 각자 만들어낸 이룬 마음을 스승으로 삼은 결과다. 그래서 부모라도 자식의 이런 이룬 마음을 무시하면 서로 간에 당장 갈등이 빚어지고 만다. 여기서 자식 된 도리, 즉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식 복종을 강요하면 이는 유가적 해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소통 해법은 유가처럼 윤리적이거나 규범적이지 않다. 또 자식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갈등을 막연히 빈 마음(無心)으로써 벗어나고자 하면 이것은 불가적 해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소통 해법은 불가에 비해 보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넘친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해서 아는데’란 어법을 자주 사용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그중 하나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대통령 참모들은 침묵이 최선의 처신임을 바로 깨닫는다. 이 점에선 박근혜 대통령도 비켜 나가지 못한다. 박 대통령 말을 곰곰 씹으면 분명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이 일리로 인해 자기 생각만을 스승으로 삼으면 호소력이 반감된다. ‘머리와 머리 간(brain-to-brain)’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해도 ‘가슴과 가슴 간(heart-to-heart)’ 소통은 이뤄지지 않는다.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을 보노라면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 인물들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토론프로그램 존재 이유는 토론을 통해 보다 좋은 결론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토론프로그램은 좋은 결론은커녕 싸움질로 도배질되기 일쑤여서 토론자 간 입장 차이만 부각된 채 끝나버려 시청자 입장에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이런 토론프로그램 구성을 통해 혹 시청률이 올라갈지 모르지만 이런 구성은 그 존재 이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처사다. 문제는 우리 정치권에서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도 이런 토론프로그램의 확대판이란 사실이다.

공리주의자로 잘 알려진 J S 밀은 ‘자유론(On Liberty)’에서 토론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자유론 제2장 ‘생각과 토론의 자유’ 편에서 “만일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을 지녔더라도 다수의 이름으로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한 사람 의견이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절대다수라도 그 의견을 들을 기회조차 막으면 이는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밀의 이런 생각을 장자식으로 해석하면 다수의 이룬 마음만 스승이 되는 게 아니라 소수의 이룬 마음도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의회가 표를 통한 여야 물리적 대결의 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들을 수용하는 용광로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J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에서 이 용광로 역할은 잘 드러난다. 밀턴은 이 책에서 ‘사상과 정보의 자유시장(free market of thought and information)’이란 개념을 소개한다. 사상과 정보의 자유시장 개념은 다양한 사상과 정보들이 모여 시장을 구성하면 이 시장에서 진리가 걸러진다는 내용을 담는다. 어쩌면 의회가 사상과 정보의 대표적 자유시장이다. 따라서 이 시장도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선 입장이 서로 다른 사상과 정보라도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구성원들이 지녀야만 한다.

소통(疏通)이란 단어는 통함(通)과 뚫림(疏)의 합성어이다. 이는 누군가와 통하려면 뚫림이 전제돼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서로의 성심으로 막혀 있는 걸 어떻게 해야 뚫을 수 있을까? 장자는 성심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허심(虛心)이다. 허심은 무심(無心)처럼 빈 마음으로 번역되지만 뉘앙스에선 큰 차이가 있다. 허심이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라면 무심은 마음 자체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심은 상대방이 있음을 전제하지만 무심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이 상대방과의 관계란 점을 감안한다면 소통이 이뤄지려면 무심이 아니라 허심의 상태여야 한다. 장자는 이런 허심의 모습을 ‘산목(山木)’ 편에서 보여준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와서 부딪치면 좁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화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배 안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당장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거기에는 욕설이 따른다.

아까는 화내지 않다가 지금 화내는 것은 아까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어서이다.

자기를 텅 비움으로써 세상을 유유자적하게 보내면 어느 누가 그를 해치겠는가!

(문화일보 4월 20일자 26면 12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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