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란 수백만 년에 걸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답답하게 진행되는 기어오르기이다. 그림은 생명의 진화를 한눈에 보이게 담아낸 진화 나무.  옥당 제공
진화란 수백만 년에 걸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답답하게 진행되는 기어오르기이다. 그림은 생명의 진화를 한눈에 보이게 담아낸 진화 나무. 옥당 제공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정은 옮김 /옥당

편집자들 사이에서는 이상하게도 ‘전설의 책’이 꼭 생겨난다. 글솜씨가 이미 검증된 해외 저자의 유명 저서일수록 ‘전설의 책’은 더욱더 편집자의 호기심과 망설임을 자극한다. 가령 리처드 도킨스라면 어떨까?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 ‘눈먼 시계공’의 초기 필독서들을 거쳐 최근의 ‘만들어진 신’에 이르기까지 도킨스의 책들은 거의 베스트셀러가 돼, 생명의 진화와 관련된 과학의 첨단 지식을 모든 사람의 상식으로 만드는 데 혁혁히 기여했다. 물론 도킨스의 편집자들은 그 대가로 여러 차례 보너스를 챙길 수 있었다.

‘불가능한 산을 올라가기(Climbing Mount Improbable)’라는 원제를 가진 전설의 책 하나가, 도킨스의 저서 중 유일하게 한국어로 출간되지 않은 것쯤은 당연히 모두 안다. 1996년에 출판돼 벌써 스무 해 가까이 지난, 과학책으로서는 다소 옛날 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책은 영국왕립연구소의 크리스마스 강연을 바탕으로 했다.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견해 ‘전기의 시대’를 연 마이클 패러데이로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강연이다. 그 강연에 속하는 것으로도, 이미 책의 깊이와 높이에서 보증수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 책은 과학 교양서의 명저로서 소문이 자자하다. 신앙을 믿음이 아니라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어수룩한 정신을 품은 이른바 ‘창조과학자’들의 지적 설계론을 철저하게 논박함으로써 진화론을 일반 대중들한테 쉽고 명확하게 설명한 것으로 정평이 난 책이다.

이쯤 되면 침이 고이다 못해 흘러내린다. 여기에서 묘한 심리가 편집자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정말 매력적인 책이야, 하지만 누가 그 책을 계약했을 거야, 무언가 결정적 하자가 있겠지, 번역이 너무 까다롭거나 번역자가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겠지 등등을 멋대로 상상한다. 그다음에는 망설임이 덮친다. ‘혹시 판권이라도 확인해 볼까’ 하는. 하지만 자신만 이미 이뤄진 계약 사실을 모르는, 관련 정보에 어둡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심리도 같이 일어선다. 실제로 아무도 진행하지 않는데도 모두가 남들이 출간하기만을 기다리는 ‘전설의 책’은 이렇게 싱겁게 생겨난다.

그러한 ‘전설의 책’ 중 하나가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았다. ‘불가능한 산을 올라가기’가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라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은 원시 지구에 홀연히 나타나서 모든 생명의 기원을 이루는 단순한 형태의 첫 번째 복제자로부터 오늘날의 복잡한 생명체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차분하면서도 매력적으로 설득한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지적 설계’라는 허구를 과학적으로 논파해 버린다.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주의적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한테 진화는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 수직으로 솟아 있는 등반할 수 없는 산처럼 보인다. 단세포의 원시 생명체로부터 눈이나 무릎이나 관절과 같은 경이로운 생체 장치가 출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진화란 고물상에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간 후, ‘우연히’ 점보 비행기가 나타난 것과 같다. 따라서 이처럼 불가능한 산 정상에 오르려면, 신과 같은 외부 요인이, 바깥에서 모든 것을 조작하는 ‘지적 설계자’가 필요하다는 엉뚱한 결론에 이른다.

물론 다윈주의자들은 다른 길을 택해서 진화의 산을 기어오른다. “불가능 한 산의 뒤쪽으로 돌아가 완만한 경사로를 발견한 것, 그것이 바로 다윈의 위대한 업적이다.” 진화란 도약 불가능한 절벽을 단번에 뛰어오르는 높이뛰기 같은 게 아니다. 수백만 년에 걸쳐서 한 번에, 한 차례씩, 전진과 후퇴를 무작위적으로 반복하면서, 고작 몇 ㎝씩, 그러나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유리한 쪽(정상)으로, 즉 무작위적이지 않은 쪽으로 답답하게 진행되는 기어오르기 같은 것이다.

다윈의 후예답게, 도킨스에게, 진화의 원리는 ‘자연선택’ 하나뿐이다. “진화 과정에서 그저 순수하게 변하여 살아남은 생물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동물은 먹이를 먹고, 잡아먹히지 않게 몸을 피하고, 번식함으로써 살아간다.” 우주의 운행이 인간의 힘이나 의도와 상관없는 물리적인 법칙이고, 그 법칙이야말로 생명체의 삶을 근본에서 규정하는 것처럼, 유전자 보전을 위한 ‘선택’이라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미심쩍은 일이 있다면 아직 탐구가 부족할 뿐이고, 세대를 이어서 과학적 탐구를 이어가야 함을 나타낼 뿐이다. 다윈이 해명하기 힘들어했던 눈의 진화적 비밀을 후대의 다윈주의자들이 기어이 과학적으로 풀어냈듯이 말이다.

이 책은 지구를 가득 메운 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구조물)들이 외부의 아무 개입 없이도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인류의 지적 성과를 집약해 멋지게 보여 준다. 이 우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명은 존재 자체가 경이롭다. 하지만 생명이 신비로운 것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인류에게 풀어야 할 과제가 무궁히 남았기 때문이다.

장은수 출판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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