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무너뜨리는 비정상일터 개선 프로젝트(5) 생산성 갉아먹는 ‘다섯가지 적들’

① 무한 회의
“잠시 모여”… 시작하면 몇시간

② 보고 또 보고
일일·주간·월간… 업무는 뒷전

③ 눈치 퇴근
PC바둑 두면서 퇴근않는 부장

④ 말뿐인 휴가
“연차 100% 소진” 22%에 불과

⑤ 카톡 감옥
해외여행 갔는데 툭하면 울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오래 일하는 국가지만, 노동생산성은 하위에 속한다. 개인적인 삶을 상당 부분 포기하며 일터에 머무는데도 다른 나라 근로자보다 성과가 낮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기업문화 안에 구조적 원인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지난 3월 대한상공회의소와 글로벌컨설팅 회사 맥킨지가 발표한 ‘한국 기업의 조직건강도와 기업문화 종합보고서’는 한국 기업에서 이뤄지는 회의의 39%, 보고 준비의 31%, 총 업무시간의 43%가 ‘비생산적’이라고 지적했다. 근로자의 태만보다는 비생산적인 기업문화가 낮은 노동생산성의 주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나영돈 고용노동부 청년여성고용 정책관은 “일터문화 개선은 아래에서보다는 위에서부터 이뤄져야 더 효율적”이라며 “경영자는 단순히 근로자가 눈치 안 보게 하겠다는 소극적 자세를 넘어, 일터문화가 변해야 생산성이 올라가고 기업의 지속가능성도 담보할 수 있다는 적극적 인식을 갖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무한회의 =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닌지 회의가 든다.” 중앙부처 공무원 A 씨는 하루에 참석하는 회의가 보통 두세 개다. 회의 하나가 최소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정작 A 씨의 업무와 관련된 회의는 한 개도 없거나 한 개 정도다. A 씨는 “오전 회의에 들어갔다 나오면 점심시간이고, 점심 먹고 눈앞에 산더미처럼 업무가 쌓였어도 오후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며 “다른 팀 업무라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는 회의 때문에 업무 처리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매일 야근을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 인사팀 과장 B 씨는 “오후에 15분만 회의하자”는 부장의 말이 두렵다. 회의는 업무시간으로 치지 않는 분위기라 퇴근 후부터 회의가 시작된다. 본 업무를 제외하고, 회의 준비에만 1∼2시간이 걸린다. 한번 시작하면 1시간 이상 이어지는 회의가 이날이라고 15분 만에 끝날 리도 없다. 지난 3월 대한상공회의소와 맥킨지가 국내 100개 기업 근로자 4만951명을 대상으로 한국 기업문화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비효율적인 한국의 기업문화는 ‘회의’였다.

◇ 보고 또 보고 = 오후 4시에 상사가 말했다. “깜빡했네. 이 보고서 작성 좀 끝내고 퇴근해줘.” 이날 업무를 마치고, 새로운 보고서 작성까지 하면 무역회사 직원 C 씨가 오후 6시 30분에 정시퇴근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C 씨는 “퇴근 준비를 하는데 보고서 작성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같은 회사 직원 D 씨는 주중 업무시간에 ‘일일보고’ ‘주간보고’ ‘월간보고’를 작성하느라 정작 자기 업무를 볼 짬이 없다. 업무를 제때 수행하려면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하루는 출근해야 한다. D 씨는 “대부분은 내용이 겹쳐 ‘보고를 위한 보고’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위로 올라가는 보고라 대충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문화 진단에서 조사 대상자들은 한국 기업의 보고문화에 41점이라는 낮은 점수를 매겼다. 그 이유로는 42%가 ‘사소한 것까지 보고 요구’, 24%는 ‘보고서 외양 및 형식 꾸미기’를 꼽았다.

◇ 눈치 퇴근 = 입사 5년 차 E 대리는 정시퇴근 시간이 30분 지났지만 부장 눈치를 살피고 있다. 몇몇 부원들 역시 E 대리처럼 적절한 퇴근 타이밍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부장은 기척이 없다. E 대리는 “부장은 인터넷 뉴스 검색이나 컴퓨터 바둑을 두면서 집에 가지 않는다”며 “오늘도 집에 일하다가 퇴근이 늦었다고 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2014년 고용부가 임금근로자 1000명과 기업 인사담당자 300명을 대상으로 ‘일하는 방식과 문화에 대한 인식조사’를 진행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주5일 정시퇴근을 하는 근로자는 26.5%에 불과했다. 정시퇴근을 하지 못하는 이유로 ‘업무 특성상 필요하다’는 응답은 35.1%에 그쳤다. 근로자들은 ‘야근을 당연시하는 회사문화(25.8%)’ ‘근무시간 중 업무효율이 낮아서(20.9%)’ ‘상사가 퇴근하지 않아 눈치 보여서(9.4%)’ ‘업무량에 비해 인원이 적어서(6.4%)’ 등 순으로 정시퇴근을 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 말뿐인 휴가 =“입사 후 처음으로 연차 3일을 써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상사가 안부 인사 한마디 없이 일을 엄청나게 줬다”고 말하는 2년 차 사원 F 씨는 “연차가 9일 더 남았지만 눈치가 보여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용부의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금근로자 10명 중 3명은 부여된 휴가 중 절반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차의 100%를 소진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22.4%, 80∼100% 미만은 23.7%, 50∼80% 미만도 20.5%에 달했다. 휴가를 사용하지 못한 이유로는 ‘업무의 특성상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가 62.5%(복수응답 가능)로 가장 높았다. ‘처리할 업무가 많아서’가 43.1%, ‘상사의 눈치가 보여서’는 33.2%, ‘업무태도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 같아서’는 21.9%였다.

◇ 카톡감옥 = “새벽에 상사로부터 업무 카톡을 받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서 다시 잠을 못 잔다.” 김 과장은 스마트폰이 일상에 미치는 위력을 매일 실감한다. 지난해 여름에는 휴가지인 태국 방콕에 도착한 다음 날 회사로부터 바이어가 약속했던 계약을 미뤄 부서에 비상이 걸렸다는 카톡을 받았다. 곧바로 숙소에 돌아와 이메일과 국제 전화를 동원해 바이어를 설득하고, 상사와 긴박하게 카톡을 주고받았다. “해외까지 와서 반나절 동안 일만 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부인의 볼멘소리에 김 과장은 “회사에 비상이 걸린 걸 알면서도 마음 편히 있을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회사가 나를 찾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기 힘들어 언제 어디서나 카톡을 확인하는 김 과장. 그는 “카톡이라는 감옥 안에 갇힌 느낌”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한국노동연구원은 ‘스마트기기 사용이 근로자의 일과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연구보고서에서 전체 조사 대상 근로자 2402명 중 70%가 업무시간이 아닌데도 스마트기기를 사용해 업무 처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마트기기를 이용한 업무 시간은 주당 평균 11시간에 달했다. 비정상적인 일터문화가 근로자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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