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논설위원

전남 신안군 섬마을에서 새내기 여교사가 학부모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20대 직장인 여성이 조현병(정신질환) 환자에게 ‘묻지 마 살해’를 당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컵라면 하나 달랑 배낭에 넣고 다니며 정규직의 꿈을 키우던 19세 비정규직 청년이 스크린도어 보수 도중 안타깝게 숨졌다. 구조조정 한파에 정규직들은 그래도 명예퇴직금을 받고 회사를 떠나 제2의 삶을 모색해 보지만 하청(下請)업체 직원들과 지역 자영업자들은 삶의 막다른 길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일들을 언제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사건들을 한 꺼풀만 벗겨 보면 구조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전라남도만 해도 300명이 넘는 여교사가 도서(島嶼) 지역에 근무하고 있는데 거주 환경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번에 사건이 일어난 섬마을의 교사 관사는 CCTV 한 대도 설치돼 있지 않다. 인구 4만4000여 명의 신안군은 전남 22개 군 중 유일하게 경찰서가 없다. 예산 부족 때문이란다. 어느 지역은 ‘예산 폭탄’을 맞는데 이 지역은 경찰서 하나 운영할 예산도 없다. 강남역 사건은 공식적으로만 50만 명에 달하는 조현병 환자에 대한 관리가 엉망이었음을 보여준다. 메트로 출신이라는 이유로 400만∼500만 원씩 월급을 받는데, 140만 원 받아 100만 원 저축하며 기관사의 꿈을 키우던 한 청년은 속절없이 스러져 갔다. 한편에선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1∼2년 만에 수백억 원을 벌어들이고, 대학 동기 잘 만나 수백억 원대 주식을 몇억 원에 거저먹는 경우도 있다. 잘나간다는 사람들의 ‘짬짜미’는 거침이 없다.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런 사건들의 뿌리를 찾다 보면 결론은 ‘정치(政治)’로 귀결된다.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이 사회 곳곳에서 문제가 곪아 터졌다. 지난 4·13 총선은 단순히 새누리당의 공천 실패에 대한 심판으로 볼 일이 아니다.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고 국정(國政)을 이끌 책임이 있는 정부·여당에 대한 경고다. 지난 19대 국회 4년은 수많은 갈등과 문제를 용광로에 넣고 풀어내기는커녕 방관하고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공기업 개혁과 노동개혁이 제대로 진행됐더라면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권 실세가 특정 지역 후보로 나서면서 ‘예산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고 필요한 곳에 골고루 분배했더라면 섬마을 교사 관사에 CCTV 하나쯤 설치하고 경찰서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전관예우가 없었다면 검찰이나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박근혜정부에 이런 난제를 해결할 능력을 바라는 것은 이제 무리다. 레임덕을 최소화하고 현상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다음 정권에 기대해 보려 하지만 대선 주자들의 인식도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강남역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SNS에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나요’라고 썼다. 위로의 말이긴 하지만 유력한 대선 주자가 이런 묻지 마 살인의 해법을 하늘의 운명에 맡긴다는 것은 기가 막힌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마찬가지다. 스크린도어 사고 현장을 찾았다가 SNS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여유가 없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계속 위험에 노출돼도 괜찮다는 것인가. 박원순 서울시장도 5년 넘게 시장직에 있었으면서 언론을 통해 수차례 문제 제기된 메트로 출신의 낙하산 인사인 ‘메피아’에 대해 “잘 몰랐다”는 어이없는 답변을 내놨다. 사돈 남 말 하듯 한다. 메르스 사태 때는 한밤에 기자회견을 하더니 이번에는 3일이나 지나서 사고 현장을 찾았다. 최근 방한을 계기로 유력한 여권 후보로 떠오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과거 회귀적’ 행보도 구설에 올랐다.

미국 대선전에서 예상을 깨고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지층의 좌절과 분노를 정확히 읽고 선동적으로 결집했기 때문이다. 트럼프처럼 무책임한 선동은 아니라도 민심과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는 능력이 절실하다. 중국의 하방(下放)운동처럼 대선 주자들도 민성(民聲)을 제대로 듣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정치의 실패’는 모든 안타까운 사연의 공범이다.
이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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