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고 인자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면 점잖은 한국의 아저씨 같다. 나지막하고 나긋나긋한 말투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한국어가 아닌 100% 영어였다. 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을 정도로 암 면역학계의 세계적 권위자인 래리 곽(57) 교수를 지난 5월 31일 서울 용산구 리움 미술관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 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의학상을 수상했다. 그와의 인터뷰에는 그의 아내 루스 곽 씨도 함께했다. 교포 2세인 그는 미국 노스웨스턴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국립암센터(NCI)에 이어 세계적 암 연구기관인 미국 텍사스대 MD앤더슨 암센터에서 11년간 근무해오다 지난해부터 시티 오브 호프 병원 암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백신을 이용해 혈액암의 한 종류인 림프종(임파선암)을 치료하는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이룬 인물이다.
본인이 주도한 림프종 백신 임상시험을 통해 혈액암 치료에 암 백신이 효과가 있음을 세계 최초로 입증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이용해 암세포를 죽이는 연구로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런 연구는 고등학교 때 가진 작은 물음 하나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캔자스대의 의학연구소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자기 연구실로 데려가 한 시간 동안 현미경으로 촬영한 종양세포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몸의 일반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못 잡는 게 너무 잘못돼 보이고 이상해 보이지 않느냐’고 말한 게 저한테 확 와 닿았어요. 한동안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고요.”
그가 20년 이상 집요하게 자기 연구에 대한 신뢰를 보내며 연구해온 면역체계를 이용한 치료법은 부작용이 많고 반복 치료를 해야 했던 기존의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를 쓰는 화학요법에 비해 부작용이 적으면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 치료법이라고 설명했다. 5년 전에만 해도 미국 학계에서 면역체계를 이용한 암 치료법은 하나의 범주(카테고리)에 들지 못했지만 그의 선구자적 연구로 새로운 영역이 구축됐다.
“암 백신은 암세포 표면에 있는 특이 단백질(종양 항원)을 이용해 환자 몸속의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공격하게 하는 치료법이에요. 비유하자면 어렸을 때 약한 독감 백신을 맞는 원리와 같아요. 아주 약한 독감 바이러스를 몸에 주사해 면역체계가 스스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죠. 암 백신이 들어가 몸 안에서 암세포와 싸우게 만드는 것이죠. 백신 치료법은 혈액암에서 시작했지만 모든 암으로 치료가 확산되는 연구를 하고 있죠. 길을 열어 주는 의미예요.”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이른바 ‘맞춤형 의학(personalized medicine)’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상용화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래리 곽 교수는 그 이유가 “백신이 반드시 개인의 암세포로부터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하나의 약을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 제약산업과는 접근법이 다르다. 그는 현재까지 각각의 다른 300여 명 환자에게 이런 백신을 이용한 치료를 시도했다고 한다. 그에게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는지 물었다.
“1993년 메릴랜드에 있었을 때 사람이 아닌 생쥐에다 해서 임상시험에 성공했을 때였어요. 그때 마침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자 극복할 방법을 연구하던 일반인 환자였어요. 저의 연구 소식을 듣고 자기를 상대로 임상시험을 해달라고 했던 거죠. 그런데 미국 내에선 허가 절차가 무척 까다로워요. 그 기간도 길어서 이분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치료받고 살아났어요. 그 후 20년 이상 크리스마스 때마다 카드를 보내왔어요. 한 해, 한 해 더 살게 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어요. 이분이 강연에 오셔서 한 말이 있어요. ‘저는 면역력이 약해서 비행기를 안 타는데 곽 교수가 부를 땐 탄다’는 것이었죠.”
래리 곽 교수에게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새로운 분야에서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인내력의 비결을 물었다.
“언젠가 한 환자가 나한테 ‘하나님의 도구(Instrument of God)’라고 불렀는데 그 말이 와 닿았어요. 그것이 지금까지 연구를 계속 하게 만들었죠.”
래리 곽 교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단순한 하나의 직업이 아니라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래리 곽 교수는 게놈프로젝트를 주도한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God)’라는 책을 언급하면서 “과학자(의학자)의 역할은 신앙(faith)을 뒷받침(support)하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저의 목표는 3개로 요약되죠. 첫 번째는 실험실에서 암 백신 연구를 계속하면서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젊은 과학자와 의사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멘토가 돼주는 것, 세 번째는 어떻게 과학이 신앙을 뒷받침할 수 있는지 젊은 과학자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죠.”
래리 곽 교수처럼 되고 싶어하는 후학들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꿈 좇기를 포기하지 말고, 다른 사람 말을 따르지 말고, 좋은 롤 모델을 찾으라고 하고 싶네요. 또 너무 다양하게 파지 말고 하나를 깊게 파라, 집중해라,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연구 분야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으로도 성공한 사람으로 국내에 알려져 있다. 수십 년간 한 분야의 연구에 무섭게 몰두하는 그이지만 집에 오면 가족에게만 집중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가족관과 자녀교육관을 담아 2009년에 ‘아이의 잠재력을 깨워라’(푸르메)는 책을 펴내 국내에서 주목을 받았다. 자녀 4명(3남 1녀)을 모두 명문대에 진학시킨 걸로 이미 유명한데 근황이 궁금했다.
“큰아들은 내시경을 전공하는 의사가 됐어요. 레지던트 과정을 끝내고 전문의를 준비하고 있어요. 둘째와 셋째 아들은 엔지니어링을 전공해 회사에서 일하고 있죠. 막내딸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시카고의 한 비즈니스 컨설팅사로부터 좋은 오퍼를 받았어요.”
자식들 자랑에 그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생업전선에 지쳐도 귀가 후 5분이라도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라”는 등 ‘따뜻한 아버지론’을 설파해 공감을 얻은 바 있다. 그런 그에게 한국 아버지들이 ‘난 저렇게까지 못하겠다, 바쁜데 가능한가’라는 반응이 나온 것에 대해 물었다.
“저는 항상 가족 우선주의였어요. 집에 오면 아예 휴대전화를 꺼놨어요. 침대에 가서 다시 전화를 켜놓긴 했지만. 애들한테 집중할 땐 전화를 꺼놨어요. 지금도 애들과 시간을 갖고 얘기하려고 해요. 저는 우리가 옳다, 잘났다기보다 단 하나 아이들에게 집중해라, 이런 걸 전하고 싶었던 거예요. 물론 미국과 한국은 다르지만 그 정도는 전할 수 있다고 봤어요.”
옆에 있던 부인 루스 곽 씨가 “막내딸이 다른 집도 다 우리 같은 줄 알았는데 대학 가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라고 거들었다. 이어 그는 짧은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과거 MD 앤더슨 센터에 펠로로 와 있던 아산병원 종양학과 김성배 교수가 ‘두 시간 동안 곽 교수에게 연락이 안 됐는데 알고 보니 애랑 같이 수학 문제 풀었다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서 “남편은 매일 30분만이라도 TV, 전화 다 끄고 오로지 애들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런 교육법을 누구한테서 배웠는지 물었다.
“어렸을 적 제 경험에서 우러난 거죠. 저의 부모님은 체육 활동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세대에선 스포츠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미국에서 자란 나한테 스포츠는 매우 중요했거든요. 가끔 부모님은 저를 야구 연습에 늦게 데려가기도 했는데 저는 ‘내가 부모가 되면 그렇게 하지 않아야지’ 했어요.(웃음) 애들은 아빠한테 배우는 영향이 크거든요. 아빠는 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해요.”
아내 루스 곽 씨는 “한국의 바쁜 아버지들에게 갑자기 변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말에 30분이라도 놀 수 있잖아요, 희생이라고 할까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내는 교육에 있어서만은 래리 곽 교수와 ‘하나의 팀’으로서 역할 분담을 했다고 한다.
“한 배를 탄 거죠. 우리는 항상 한 팀이고 원하는 게 같아요. 아이들이 중요하다는 걸 마음에 새기고, 남편은 제가 집에서 애를 키우는 게 더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했어요. 그래서 집에 와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등 팀워크를 유지했어요.”
부부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을 뿐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마다 각자 프로그램이 달라요. 저는 과학자가 됐지만 아이들은 다 독특할 수 있어요. 성격, 재능 등등 다 달라요. 부모님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게 좋은 부모로서 옳은 방향이에요.”
아내 루스 곽 씨도 거들었다.
“동양의 부모님은 직업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각자 개성이 다르다는 걸, 내면을 살피는 거죠. 음악 교육도 그래서 우리는 네 명 모두한테 시키지 않았어요. 한국 부모 같았으면 일단 모두에게 다 시켜봤겠죠.”
래리 곽 교수 부부는 사진 촬영 중에도 서로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는 것을 잊지 않았고, 서로 존중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인터뷰 = 방승배 차장(경제산업부) bs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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