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한수산 소설 ‘부초’ 속 애달픈 공간 … 중앙선 ‘풍기역’
‘오류역’에서 그것은 시작됐다. 그래서 지금도 ‘오류동’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나는 가슴에서 무언가가 술렁거린다. 중앙선의 ‘풍기역’은 한결 더 애절하다. 풍기역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부초’는 늦가을의 갈대숲처럼 수런거린다. 내 삶에 소설가라는 철길을 깔아 준 장편소설 ‘부초’는 그렇게 시작됐다.
철새처럼, 서커스단들은 봄이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북쪽으로 올라왔다가 겨울이 되면 따스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난방시설은커녕 펄럭이는 천막 안으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열악한 시설로는 겨울 추위를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1975년으로 기억한다. 2월 하순 신당동에 있던 한국곡예협회에 찾아갔더니, 내가 취재원으로 삼고 있던 ‘고려곡예단’이 드디어 서울로 올라와 공연을 시작했다고 알려줬다. 올해 첫 천막을 친 곳이 영등포 쪽 어딘가에 있는 이름도 처음 듣는 오류동이라고 했다. 그곳 어딘가 은행 건물 옆 공터에 천막을 쳤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많이 친해진 낯익은 얼굴들을 떠올리며, 반갑고 기뻤다. 그래도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겨울을 넘겼구나. 내가 부초의 취재를 시작한 1970년대 초, 그 무렵은 서커스단들이 몰락의 길을 걸으며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을 때였다.
물어물어 찾아간 오류동 공터에는 흙바람만 불고 있었다. 이미 단체는 떠나고,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막을 세웠던 빈터에는 말뚝을 박았던 자리만이 아직 흙이 드러난 채 어수선했다. 길가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어가서 물었다.
“여기 서커스가 있지 않았나요?”
“간 지 한 사흘 됐나. 손님이 없으니까 후닥닥 천막을 걷더라고요. 요새 세상에 누가 그런 걸 보겠어요.”
첫 말뚝부터 잘못 박다니. 천막을 올리고 나면 최소한 4주 정도는 그곳에서 공연을 해야 하는데 벌써 떠나버렸다면 첫 공연부터 망했다는 소리였다.
낯선 거리를 걸어 오류역 플랫폼 끝에 가 섰을 때였다. 김포 쪽 하늘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러면 어떨까, 서커스에서 공연을 하며 떠도는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가 있다고 하자. 남자 쪽 집안의 반대 때문에 함께 살았던 짧은 시절을 꿈처럼 남긴 채 곡예사의 사랑은 끝난다. 끝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남자를 잊지 못하며 여자는 서커스를 따라 떠나고 또 떠나면서 살아간다.
그렇다. 이 여자 곡예사가 주인공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플랫폼 바닥에 주저앉아 메모를 해 나갔다. 부초의 여주인공 ‘석이엄마’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함께 살았던 짧은 시절의 서글픈 열매처럼 아들이 태어나고, 종갓집 장손인 풍기의 남자 동일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곡예사 석이엄마는 서커스를 따라 전국을 떠돈다. 그런 여자와 아들을 보기 위해 남자는 여름과 겨울이면 서커스를 찾아온다.
이것이 취재가 끝나갈 무렵 만들어진 부초의 여주인공 캐릭터였다.
‘단체’란 서커스에서 자신의 곡예단을 지칭하는 일종의 은어다. “난 단체가 망하는 바람에 요즘은 야간업소에서 마술을 해. 넌 아직 단체에 있니?” 하는 식이다. 그들은 서커스니 곡예단이니 하는 말을 자신들끼리는 결코 하지 않는다.
언젠가 방송국에 들렀다가 PD와 함께 점심을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였다.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옆 손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단체에 있을 때 얘긴데요” 하고 말하지 않는가. 나는 귀가 번쩍 뜨여서 그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혹시 서커스에 계셨습니까?” 내 말에 이번에는 그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단체라는 말은 그렇게 쓰였다.
단체에서 생활해야 하는 곡예사들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이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아이가 취학연령이 되면 누군가에게 맡겨서 학교를 다니게 해야 할 텐데, 이것처럼 큰 고민이 없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부부 곡예사는 결국 남자는 서커스에 남고 여자는 아이를 기르기 위해 단체를 떠나는 것이 곡예사들의 현실이었다.
석이엄마에게도 그때가 찾아왔다. 결국 아이를 풍기에 살고 있는 아버지 동일에게 떠나보낸다. 피눈물의 이별. 아이를 보낸 후 넋을 놓고 술에 기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석이엄마에게 동료 곡예사가 말했다. “석이엄마, 이러다가 사고라도 낼까 무섭네요. 한번 다녀오지 그러세요. 아이 얼굴이라도 보고 오면 마음도 좀 가라앉지 않겠어요.”
중앙선 열차에 몸을 싣고 풍기로 찾아온 석이엄마는 역대합실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올 남자를 기다린다. 그와 함께 살았던 풍기에서의 짧은 날들이 그녀의 가슴속을 오간다. 깊고 가파른 산에는 희방사라는 절이 있었지. 그래서 풍기 다음 역 이름도 희방사역이었어. 어설프게 시작한 살림살이 속에서, 사랑하기 위해서는 둘만 있으면 되지만 같이 사는 데는 밥솥도 걸레도 있어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어.
아이를 기다리며 석이엄마는 풍기역 앞을 서성거렸다. 길 건너 이발소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들어가고, 한낮이 기우는 역 앞 거리를 이따금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 장면을 쓰기 위해서 나 또한 풍기역 대합실과 역 앞 거리를 오갔다.
풍기역 앞에서는 어떻게 해가 기우는가, 역 앞을 오가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인가. 낯익은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역무원의 표정까지 꼼꼼히 노트에 적어가면서 하루를 보냈다. 텅 빈 역 앞의 이발소와 그 거리를 무심하게 오가는 자전거, 선로에 부딪히는 햇살, 하염없이 뻗어 있는 선로에 가 멎은 채 움직이지 않는 석이엄마의 눈길. 내가 바라본 것들은 소설 속에서 석이엄마가 바라보는 것들이 됐다.
석이엄마와 동일의 마지막 장면, 소설 속 가장 슬프고 애달픈 장면이 이루어지는 곳도 풍기역이었다. 남자는 말한다. “가거라. 가서 기다려라. 내가 아이를 굶기겠니. 헐벗게 하겠니. 아이가 다 커서 제 발로 엄마를 만나러 갈 때를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풍기역은 그렇게 석이엄마가 끝내 아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혼자 눈물 속에 돌아가야 하는 무대가 됐다.
서커스 천막 안으로 돌아온 석이엄마는 이른 새벽 목욕을 다녀오며, 뜨개질을 시작한다. 공연 틈틈이 천막의 그늘을 따라 의자를 옮겨가면서 아이에게 줄 옷을 뜨기 시작한다. 먼 훗날을 위한 옷이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 찾아올 아들의 치수에 맞는 옷을 뜨는 석이엄마. 헌헌장부가 되어 이 엄마를 찾아올 때 네게 줄 옷이란다, 수없이 되뇌는 그 말 속에서 세월은 오히려 희망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단체들은 파이프를 연결해서 천막을 쳤고 그런 단체에서는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불쇼를 하거나 커다란 철제 원통 속에서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가 돌아가는 연기를 했다. 악사나 무용수들의 무대의상도 화려했다. 그러나 여전히 새끼줄로 기둥을 엮어 올리고 천막을 치는 단체들이 있었다. 그런 단체에서는 보기에도 민망한 김칫독 같은 것을 누워서 발로 굴리고, 남자 곡예사가 어깨에 올려놓은 사다리를 맨 위까지 기어 올라간 어린아이가 물구나무를 서며 손을 흔들었다. 무대의상이라고 입은 타이즈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부초를 통해 나는 한국 서커스의 몰락을 보았던 것이다.
197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발표된 부초는 해방 이후 최고 판매 부수라는 기록을 세우며 문학작품으로는 이례적인 사랑을 받았다. 영화화가 진행됐다. 내가 취재를 할 때는 그래도 몇 단체에서 서커스의 꽃인 공중 그네타기를 했었다. 그러나 영화를 찍으려니 공중곡예를 하던 그 곡예사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타일공이 되어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돈벌이를 나갔다는 것이었다. 서커스단도 겨우 3개가 남아 있었다. 부초의 무대가 돼줬던 고려곡예단도 그렇게 사라져 갔다.
최근 나는 27년의 세월을 매달려온 소설 ‘군함도’를 끝냈다. 1977년의 부초에서 2016년의 군함도까지 작가로서 내 삶은 그렇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부초의 40여 년도 마찬가지였다. 그 세월 동안 부초는 영화로, 드라마 미니 시리즈로, 라디오 소설로, 곡예사의 사랑을 노래하는 가요로까지 번져 나가며 사랑을 받아왔다.
몇 해 전에는 배우 고 강태기 씨와 명우 조명남 씨의 열정으로 연극으로 만들어지는 영광도 있었다. 한국연극배우협회 회원들이 마련한 연극 부초는 전국을 순회공연하며 부초처럼 떠돌았다. 석이엄마의 서글픈 사랑은 그때도 곡예사의 애틋하기만 했던 사랑이 되어 관객들을 울렸다고, 순회공연에 참여했던 배우는 눈물을 글썽였다.
소설 속에서 희방사와 풍기역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곳으로 그리고 가장 슬픈 곳으로 여주인공의 무대가 돼 있다. 그래도 그날들이 내 삶에서 가장 햇살 가득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는 석이엄마가 부초 속의 희방사와 풍기역에는 있다.
그러나 오늘 풍기역은 부초를 쓰던 40여 년 전의 그 역이 아니다. 깔끔한 새 역사를 나오면 옛 증기기관차 시절의 급수탑이 이제는 명품 풍기인삼의 선전탑이 돼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운행됐다는 증기기관차 901호가 전시돼 옛날을 추억한다. 인삼축제가 열리면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가 길을 메운다.
몇 해 전 겨울이었다. 부석사를 다녀오는 길에 풍기역 앞에 섰다. 얼마 만인가. 그날따라 소백산 능선을 쓸며 휘몰아쳐 온 바람뿐, 소설 부초는 풍기역 앞에서 쓸쓸했다. 석이엄마여. 이제 눈물을 거두고, 그대는 어디로 떠나갔는가.
한수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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