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중앙대 교수·교육학

지난 13일 서울 지역 주요 사립대 총장들이 교육부의 간섭과 통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10개 대학 총장들은 ‘미래대학포럼’이라는 모임을 출범하는 자리에서 그간 교육부의 눈치를 보느라 자제해 왔던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을 향해 ‘변해야 산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통제를 기저로 하는 우리나라 교육부의 고등교육 정책은 해방 이후 그다지 바뀐 게 없다. 몇 해 전 미국의 고등교육을 공부하는 단기 연수 과정에 지원한 교육부 공무원에게 유학 온 목적을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서슴없이 “미국 정부가 대학을 어떻게 통제(control)하는지 배우고 싶다”고 대답, 필자는 물론 함께 배석했던 미국의 한 주립대 교수를 아연실색하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것이 교육부 공무원들의 공통된 인식이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무려 21년 동안 그리고 다시 2006년에서 2007년까지 하버드대의 총장을 지낸 데렉 복은 그의 대표적 저서에서 미국 명문 대학들의 가장 중요한 성공 비결을 자율이라고 밝히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유럽의 공립대학들도 정부의 통제나 간섭을 거의 받지 않는다. 중세 유럽에서 탄생한 대학은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교육 내용, 독자적인 인사권, 그리고 면세권 등의 특혜를 누렸다. 이러한 특혜가 현대에 이르러 교무·학사·인사·재정 등의 자율권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의 자율이란 무엇인가?

우선, 자율성이란 외적인 통제와 간섭의 배제를 말한다. 외적인 통제와 간섭은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교육의 다양성과 유연성을 저해한다. 결국, 자율 없이는 대학교육의 다양성은 성립될 수 없다. 다음으로, 자율성은 곧 책무성과 직결된다. 자율은 방종(放縱)이 아니다. 방종은 무책임하지만, 자율에는 엄한 책임이 수반된다. 대학이 자율적으로 행사하는 모든 권한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대학의 몫이다. 끝으로, 자율은 대학의 생존력, 즉 경쟁력을 의미한다. 규제와 간섭에 익숙한 대학은 피동적인 타성에 젖어 급격한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의 자율이 보장되는 체제 아래서는 어느 대학도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을 수 없으며, 오로지 개별 대학의 경쟁력과 노력만이 존속과 성공을 보장해 줄 뿐이다. 결국, 자율성이 결여된 대학은 생존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대학의 자율은 대학교육의 다양성과 책무성 및 경쟁력을 포괄하는 개념이자 원리다. 그런데 왜 교육부는 애써 대학의 자율을 제한하려 하는가. 교육부가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에 대한 불신이고, 이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은 물론 대학에도 있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불신이 정부의 규제를 언제까지나 정당화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 같은 규제로는 불신을 원천적으로 해소할 수도 없다. 만일 교육부가 대학보다 더 많은 신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이다.

이제 교육부는 대학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와 같이 정부가 대학을, 그것도 사립대학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구도 아래서 대학의 선진화는 불가능하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교육부 무용론’은 다소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교육부의 환골탈태(換骨奪胎)는 시대적 요구다. 고등교육 정책의 방향이 간섭과 규제에서 지원과 감시로 전환돼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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