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정조대왕은 어좌 뒤에 일월도(日月圖) 대신 책가도(冊架圖·책장을 그린 그림)를 놓았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에 나선 정조는 책을 통치의 중심에 두었다. 왕실에서 시작된 책 읽기 문화는 반가(班家)와 서민층으로 퍼졌다. 보기 드문 ‘책의 제국’이었다. 18세기 광통교 일대에 책사(冊肆·서점)가 즐비했다. 서민들까지 독서 열풍에 가세하자, 무교동에 상업 출판을 하는 업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8폭 짜리 거대 병풍으로 만들어지는 책가도가 양반 저택을 꾸미는 품격 높고 값비싼 물건이 되면서 색채가 갈수록 화려해졌다.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문자도·책거리’전이 11일부터 8월 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책장 속의 도자기 등 화려한 물건들이 눈을 놀라게 하는 장한종의 책가도, 호피 휘장 사이의 고급 책장 풍경을 정밀하게 그린 ‘호피 장막도’는 서양 근대기의 걸작 회화 못지않다.
지난 5월에 찾았던 도쿄(東京) 진보초(神保町) 고서점가의 한국서적 전문 북카페 이름은 ‘책거리’다. 책거리는 책 한 권을 뗐을 때 스승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다. 이 서점에서만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8000권이나 팔렸다. 이 책의 번역자인 데버러 스미스는 15일 “(한국의) 노벨상에 대한 집착은 약간 당황스럽다. 작품을 독자가 즐긴다면 그것으로 작가에겐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충고했다. 두꺼운 독서층이 있어야 세계적 작가가 나온다는 것은 자명하다.
지난 1000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 ‘책가도’의 나라였던 한국의 지식수원지(水源地)가 말라가고 있다. ‘2015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4명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충격적 수치다. 정치나 경제가 대동맥이라면 문화란 실핏줄 같은 것이다. 대부분 인간은 실핏줄이 터지거나 잘못돼 뇌출혈 등 사망에 이르게 된다. 한 나라의 산업 경쟁력 역시 깊은 저수지 같아서 독서와 저술을 통한 기나긴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책가도’ 그림을 펼쳐놓고 책 그림만 어루만져도 좋다고 말했던 정조의 마음과 독서 습관을 되살려 새로운 축적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문화지체국가’가 되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경각심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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