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올 선정‘올해의 장인’… 60년 외길 윤규상 전시회
들기름 먹인 한지로 만들어
천우산에는 없는 소박한 멋
대 손질·한지구입 홀로 작업
비닐우산에 밀려 문 닫기도
“中·日産보다 품격있고 견고”
국내에서 유일무이하게 ‘지우산(紙雨傘)’(사진)을 만들며 전통우산의 맥을 이어가는 윤규상(75·전북무형문화재 제45호) 장인이 우산을 처음 접한 것은 17세 때였다. 전북 완주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우산공장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모두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든 지우산을 썼다. 윤 장인은 이후 60년 가까이 지우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윤 장인의 지우산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재단법인 예올(이사장 김영명)에 의해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된 후 마련된 전시다. 대나무를 다듬어 손대와 살대를 만들고 여기에 들기름 먹인 한지를 발라 만든 지우산은 화려한 디자인과 문양의 천우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단아하면서 소박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비만 오면 지우산을 옆구리에 낀 채 뛰어다니며 행인들에게 팔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윤 장인이 만들던 지우산도 그렇게 팔렸다.
“처음 전주의 한 우산공장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술자들이 하는 일을 어깨 너머로 보며 핵심 과정을 익혔어요. 우산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에 휴일에는 집에서 대나무를 깎고 쇠꼬챙이를 연탄불에 달궈 대나무에 구멍을 내는 방법으로 우산을 혼자 만들곤 했습니다. 기술을 연마한 끝에 25세에 독립해 우산공장을 차렸죠.”

그 와중에도 우산에 대한 생각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지우산을 만드는 사람도 없고 지우산을 만드는 기계나 도구가 없는 상태에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다. 자칫 옛 기록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지우산의 명맥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원래 우산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복잡하고 각 제작단계가 분업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윤 장인은 대나무와 한지 구입부터 모두 혼자 해내야 했다. 담양을 오가며 맹죽과 왕대를 구입했고 손대로 쓰기에 좋은 오죽이 있다고 하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갔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에 지우산 공방을 다시 차린 10여 년 전부터는 아들 윤성호(37) 씨도 주말이면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아예 다니던 반도체회사를 그만두고 조수 겸 제자로 들어앉았다. 아버지의 공방에 ‘비꽃’이라는 예쁜 이름도 지어주며 가업을 잇기로 작정한 것이다.
윤성호 씨는 지우산이 충분히 사업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 지우산은 일본 지우산에 비해 덜 화려하지만 그래서 더 품격이 있고, 중국산이나 동남아산에 비해 훨씬 견고하다”며 “실용성은 물론 장식과 패션 측면에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지우산은 천우산보다 약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름을 먹인 한지는 천처럼 잘 찢어지지 않고, 특히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대나무 살대가 견고하게 천을 잡아주기 때문에 뒤집어지는 일이 없다.
윤 장인은 “앞으로 지우산이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정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지우산을 만들며 어렵고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여러 대회에 출품해 상을 받고, 2011년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어요. 평생 우산 만드는 일밖에 몰랐던 저한테는 정말 기쁘고 보람 있는 일들이었죠. 저로 인해 지우산의 명맥을 이어간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마지막까지 지우산을 꾸준히 만들어야죠.”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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