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준 논설위원

“내 살아생전에 민주당 후보, 그것도 힐러리에게 표를 던지게 되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마녀(witch)’라고 부르며 맹비난하던 한 골수 미국 보수주의자가 이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최근 일부 공화당 인사가 도널드 트럼프 후보로부터 떠나는 현상을 브렉시트에 비유한 ‘트렉시트(Trexit)’가 일어나고 있다. 로버트 케이건, 윌리엄 크리스톨 등 네오콘 주요 인사들은 물론, 미국 전통적 보수주의 진영의 대표적 원로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국가안보 보좌관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이들은 트럼프 외교노선을 미국 보수주의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하고, 힐러리 클린턴이란 ‘차악(次惡)’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힐러리, 너마저도”란 소리가 나오게 됐다. 지난 1일 민주당 전국위원회(DNC)가 공개한 대선 정책 기조 초안을 보면, 기존 자유무역협정(FTA) 재검토, 환율 조작국 강력 응징,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수정 등 온건하긴 하지만 트럼프 노선과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힐러리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타협의 산물이다. 민주당 정책 기조 초안 작성위원회는 힐러리 측 6명, 당내 경선 상대자였던 버니 샌더스 측 5명, 그리고 데비 슐츠 DNC 위원장 측 4명 등 15명으로 구성됐는데, 이는 샌더스 표를 묶어내기 위함이었다. 또 이런 트럼프 모방주의(me-tooism)는 11월 대선 승리를 위한 고육책일 가능성이 크다.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란 용어 자체가 2011년에 힐러리 당시 미 국무장관의 ‘미국의 태평양시대’란 포린폴리시지(誌) 기고에서 처음 사용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힐러리가 신고립주의 정책을 선호할 리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이다. 양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것이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 때문이라고 판단한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2차 세계대전 전후 세계 평화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주요 기둥으로서의 브레턴우즈 체제가 등장하게 됐으며, 이것이 훗날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발전돼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브렉시트 사태가 잘 보여주듯, 신고립주의 물결이 전 세계적으로 다시 불어닥치고 있다. 특히, 이 신고립주의 현상은 ‘교양 있고 합리적 개인’인 시민을 전제로 한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와 맞물리며 더욱 증폭되고 있다. 배타적 민족주의와 과잉 복지를 앞세운 포퓰리즘의 거센 파고 앞에 합리적 국가 이성이 설 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사적 지각 변동은 자유무역 체제하에서 번영을 일궈온 대한민국에 큰 시련이 될 수 있다. 경제 문제만이 아니라 안보 환경도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힐러리가 ‘아시아 중시’를 처음 꺼냈을 때, 가장 큰 반대 논거 중의 하나가 ‘어디서 그것을 위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느냐’였다. 브렉시트 이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심지어 서태평양(동아시아)을 포기하자는 로버트 카플란과 같은 ‘신현실주의자(neo-realist)’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구조조정을 통한 경제적 기초 체력 확보와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sj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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