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진행절차 합의 취지 무색
피고인 ‘바람쐬는 날’ 로 여겨
재판부 시간·비용 낭비 지적


독성 화학물질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팔아 각각 16명과 12명의 사망자를 낸 롯데마트와 홈플러스 관계자들에 대한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이 8일 오전 열렸다. 하지만 수사 기록에 대한 변호인의 열람·등사가 이뤄지지 않아 기록물에 대한 설명과 이를 어떻게 검토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8부(부장 최창영)는 이날 오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등으로 기소된 노병용(65) 롯데물산 사장 등 업체 관계자 8명에 대한 1차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오늘 결국 열람·복사 이야기만 하다 끝나는 모양이 됐다”며 “앞으로 기록 등에 관해 전자 파일 형태로 변호인 측에서 공유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같은 재판부에서 같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신현우(68)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 등도 사건 기록이 방대해 아직 검토가 모두 이뤄지지 않아 정식 재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근 여론의 주목을 받는 주요 사건에서 연달아 공판준비기일이 열리고 있지만, 변호인 측의 기록 검토가 끝나지 않거나 검찰 측이 증거 목록과 추가 기소 여부를 제대로 밝히지 않아 공전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재판력 낭비’라는 비판이 높은 이유다. 재경지법 부장판사는 “의미 없이 종료되는 준비기일을 열 시간에 다른 재판을 진행할 수도 있고, 사건 기록 검토를 한 번이라도 더 해볼 수 있다”며 “아무 의미 없이 절차상 진행해야 하는 자리로 전락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준비기일에는 피고인의 출석 의무가 없으나, 최근 주요 사건의 피고인들은 모두 재판정에 출석했다. 주요 사건 피고인 대다수가 구속 상태이기 때문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법정이라는 어려운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구치소보다야 좋지 않겠느냐”며 “구속 피고인의 경우 준비기일을 통해 ‘바깥바람’을 쐬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고 쓴소리를 했다.

실제 신 전 대표의 경우, 4일 세 번째 공판준비기일이 열렸는데도 변호인이 방대한 자료를 다 열람·복사하지 못해 피고인 측 의견을 들을 수 없었다. 같은 날 열린 ‘법조 로비 의혹’ 최유정(여·46) 변호사의 두 번째 공판준비기일도 ‘기록 검토 미비’로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종료됐다. 6일 열린 정운호(51)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은 아예 검찰로부터 변호인이 수사 기록을 넘겨받지 못해 진행될 수 없었다. 다음날 열린 법조 로비 의혹의 핵심 브로커인 이민희(56) 씨의 첫 공판준비기일도 ‘변호사 선임을 못 했다’는 이유로 소득 없이 끝났다.

이후연 기자 leewh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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