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시인, 예술원 회원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우리나라가 아직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한 1960, 1970년대를 두고서 하는 이야기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이야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지금 노년에 든 사람들이라면 아마 이런 푸념을 듣곤 나름대로 일말의 공감을 표한 적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단군 이래 이만큼 풍요를 누린 적이 없는 오늘이라고들 하는데, 국민소득 1000달러 안팎의 가난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니…, 대체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므로 모든 과거는 아름답다는 낭만주의자들의 비현실적 동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 그 시절의 삶이 지금보다 더 행복했다고 확신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급변하는 최첨단 산업사회를 살면서 제때 적응하지 못하는 노년들의 낭패감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아마도, 단지 ‘꼰대’들의 푸념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다른 어떤 뜻이 내포돼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이 말에는 적어도 그 시절에는 제 자식을 수년 동안 표나지 않게 때려 시름시름 굶겨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 시신을 훼손해서 몇 달씩이나 자신이 기거하는 방의 냉장고에 방치하는 부모가 없었다는 뜻이 들어 있다. 노인정에서 화투놀이를 하다가 몇 푼 잃은 것에 화가 나서 같은 동네의 친구들을, 농약을 먹여 살해한 시골 할머니가 없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좀 했다고 해서 그를 죽인 뒤 두 동강 낸 시신을 하수구에 버리는 청년이 없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처음 만나는 사람은 무작정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여 선생님을, 강제로 술을 먹여 성폭행하는 학부모들이 없었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이 말에는 또한 물신주의에 야합한 권력과 기업이 무고한 300여 명의 생명을 진도 앞바다에 수장시키고도 그 근본 원인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는 비인간적인 행태가 그때는 없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생존의 한계선에 내몰린 수십만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청년들을 나 몰라라 하면서 오로지 자신과 자기 가족의 잇속만 채우기 위해 갖은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는 일부 재벌과 가진 자들의 횡포가 그때는 없었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 그래서 좀 못살아도, 끼니를 때우지 못해 다소 배가 고프더라도 주어진 고통을 함께 견뎌내던 그때 그 시절이 그래도 지금보다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의미이긴 하지만, 그때가 지금보다는 더 ‘인간적’인 사회였던 까닭에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이 세상에서 ‘인간’보다 더 고귀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정치도, 경제도, 생태 환경도, 과학기술도 따지고 보면 궁극적으로 모두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문학, 그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문학의 입문서에서는, 삶을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해서, 과학은 동력을 만드는 돛에 해당하지만 인문학(인문정신)은 방향을 결정하는 키에 해당한다고 가르친다. 인문학이란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그 인간됨은 과연 어떠해야 하며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탐구, 실천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인간은 빵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은 오랫동안 경제 논리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국가를 경영해온 나머지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인문정신을 함양·발전시키는 일은 홀대하거나 등한시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인간화 현상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사태는 호전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곳곳에서 인문학과 인문정신이 붕괴되는 소리는 오히려 점점 더 요란해질 뿐이다. 대학에서 인문학과는 통·폐합되거나 추방되고 있으며, 인문학자나 그 전공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현 정부 들어서, 특히 인문학 혹은 문학 창작을 지원하는 예산은 반 토막으로 줄어들었다.

나는 ‘창조 경제’라는 말의 뜻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인문학을 강조하는 정부 차원의 시류적 립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인문학을 상품으로 변조시키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또, 한류에 대한 정부 차원의 칭송이 보여주듯, 정책 당국은 문화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내몰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인문정신을 기업 경영의 방편으로 삼아 경제 생산성을 제고시키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이란, 문화 예술이란 원래 돈벌이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을 함양하는 자양분으로서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 아닌가. 본질적으로 인문학이, 또는 문화 예술이 돈이 되긴커녕 오히려 돈을 축내는 탕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호라는 선박의 돛이 아니라, 방향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이 배를 운전하는 선장의 실천적 의지를 확인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당신이 인문정신과 문화 예술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다시피 했던 사실이 문득 떠올라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대중 앞에서 한 편의 시라도 낭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통령, 국회 개원식을 관현악의 연주와 함께 시작하는 국회의장, 미술관에서 우리와 불쑥 마주치는 대법원장을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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