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4일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흥미로운 대목이 여럿이다. 헌정 초유의 ‘비례 5선’임에도 처음 내놓은 자신의 ‘브랜드 법안’이다. 그의 남다른 경력과 식견을 감안하면 의외다. 더민주 의원 107명 외에 국민의당 10명, 정의당 2명, 그리고 새누리당 1명까지 이름을 올렸다. 초당적 법안이라고 할 만하다. 내용이 독창적인 건 아니다. 법무부가 2013년 7월 입법 예고한 개정안과 흡사하다. 박근혜정부도 얼결에 수저를 얹은 모양새다. 여야도, 세월도 뛰어넘는 합작품인 셈이다. 그걸 한데 묶는 끈이 ‘경제민주화’다.
2012년 대선을 달궜던 경제민주화가 4년 만에 돌아왔다. 당시 의제를 선점하면서 새누리당 승리에 기여했던 김 대표가 이젠 적장이 되어 불씨를 되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대 국회 시작과 함께 더민주는 ‘김종인표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쏟아내는 중이다. 지난 국회 때 낸 것을 자구만 바꾸거나 합쳐서 낸 재활용 법안이 다수라고 한다. 그러나 법안 하나하나가 기업활동에 미칠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김종인 상법’만 해도 소액 주주 권리를 내세워 외국에는 없거나 극히 제한적으로 운용되는 제도들을 대거 도입하려 한다. 포이즌 필·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보호 장치가 없는 국내 기업은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이 내부 단속에 시선을 돌리면 모험적 투자는 어려워진다. 기업가 정신은 움츠러들고, 일자리 창출 여지는 줄어드는 것이다. 다른 경제민주화 법안도 주 타깃은 기업이다.
한국사회에서 경제민주화 의제가 끊임없이 소환되는 것은 곤궁해져가는 국민의 삶과 무관치 않다. 소득격차로 인한 사회 전반의 양극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됐다. 그러나 경제민주화가 그 해결책인지는 분명치 않다. 1987년 헌법에 경제민주화가 이름을 올린 지 30년째를 맞지만 그 개념부터가 여전히 모호하다. 원조를 자처하는 김 대표는 지난달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경제민주화는 거대경제세력이 나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의 경제민주화론은 지극히 정치공학적이다. 진작부터 “경제력의 힘이 언젠가 정치세력을 압도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그는 2012년에는 “우리(cage)를 만들어 그 안에서 키워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에게 대기업집단은 정치와 권력을 다투는 경쟁자, 곧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다.
경제민주화의 근거인 헌법 제119조 2항 ‘국가는…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은 기존의 ‘사회정의’를 ‘경제의 민주화’로 교체하고 ‘필요한 범위 안에서’란 단서 문구를 뺀 것이다. 또 제1항의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개인과 기업의…’로 ‘기업’을 추가했다. 전체적으로 읽으면 당시 6·29선언이 가져온 정치 민주화처럼 경제 영역에서도 통제경제를 극복하고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한다는 취지 아니겠는가. 지금 와서 정치권이 시장통제를 강화하고 기업 활동을 제약하는 무기쯤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오독(誤讀)이다.
지난달 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3당 대표는 약속이나 한 듯 ‘4차 산업혁명’에 긴 시간을 할애해, 위기이자 기회인 그 흐름을 놓쳐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주력 제조업의 침체로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한국경제는 신속히 구조조정을 끝내고 신산업과 신기술이 주도하는 환경에 슬기롭게 대응해야 활로가 열린다. 변혁기를 맞은 글로벌 산업 현장에선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사업, 기존 잣대로 묶을 수 없는 기업, 융복합을 통한 신제품이 분초를 다투며 출현하고 있다. 이들과 경쟁하려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접근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물론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4차 산업혁명에 대처하는 방법론 대신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인 양 받들 뿐이다. 경제 현실은 4.0인데, 진단과 처방은 선·악 이분법의 1.0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형국이다.
한국사회에서 경제민주화는 이름과 달리 정서에 기댄 비경제적인 규범이다. ‘1987년 체제’에 머물러 있는 낡은 틀이기도 하다. 그런 수단으로 저성장과 양극화, 신산업 경쟁에 직면한 대한민국을 구출할 수는 없다. 김 대표가 4년 전 쓴 책 제목은 역설적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