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재 연세대 교수·행정학

1825일.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일수다. 새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기 전인 2018년 2월 24일 밤 12시까지 박 대통령에게 남은 시간은 576일이다. 청와대에 머무는 동안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낄 것이다. 박 대통령의 남은 시간은 박수보다는 쓴소리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계파싸움과 공천 파동으로 얼룩진 여당의 총선 참패 이후부터 대통령에 대한 쓴소리는 이미 안팎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더욱이 진경준 전 검사장의 비리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각종 의혹은 본격적으로 대통령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모양은 다르지만, 전임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경험한 일들이다. 대통령 본인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위해 박 대통령이 남은 시간을 현명하게 계수하며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이유다.

대통령의 시간은,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법령집행권, 국군통수권, 긴급명령권, 인사권처럼 헌법에 명시된 권한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권력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대통령의 권력은 대통령의 남은 임기와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남은 임기가 길면 새로운 국정 과제를 제시하고 혁신을 주도하는 대통령의 의지는 탄력을 받는다. 대통령의 시간이 대통령의 권력을 만들어내는 구심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시간이 줄어들면 헌법상의 권한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대통령의 권력은 줄어든다. 때로는 친인척 비리나 측근 비리가 불거지고 권력 누수가 생겨 임계점이 지나면 이른바 레임덕으로 바닥을 치기 십상이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박근혜정부 3년 정책 모음’을 통해 지난 재임 기간에 추진한 다양한 정책의 성과를 홍보하고 있다. ‘국민과 함께하는 변화와 혁신, 도약의 길’이라는 소제목이 눈에 띈다. ‘경제 재도약의 기틀을 닦아 나가면서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의 두 날개를 펼쳐 일자리를 늘리고 국민 행복을 이루어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경제부흥,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국민행복, 평화통일 기반구축, 비정상의 정상화 등 5대 국정 과제를 제시했다. 국정 과제 체계도에 따르면 경제부흥 분야에 3대 전략과 42개 과제 등 총 14대 전략과 140개 과제를 포함하고 있다. 남은 대통령의 시간 동안 그동안 추진해온 핵심 국정 과제를 꼼꼼하게 챙길 수만 있다면 나름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희망 사항일 뿐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을 거라는 게 많은 사람의 예측이다.

지난 월요일부터 박 대통령은 무거운 마음으로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통상 공식적인 행사는 없는 휴가지만, 대통령의 휴가 구상은 향후 정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풍향계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임기 반환점을 지난 작년의 경우를 보면 여름휴가 나흘째인 7월 30일에 박 대통령은 ‘하루가 짧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더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다’는 소회를 페이스북에 남겼다. 청와대에서 여름휴가 나흘째를 보내는 오늘, 박 대통령의 시간은 더 빠르게 지나가고 있을 것 같다. 지난해처럼 책과 보고서를 읽으며 보내기보다는 가시화하고 있는 레임덕 가능성을 조기에 차단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우 수석에 대한 각종 의혹으로 야기된 사태를 청와대 참모진 개편이나 개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질 것이다. 특별 감찰 결과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 수석에 대한 무한 신뢰를 통해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정면 돌파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자를 선택할 경우에 대통령을 향한 쓴소리가 잦아지기는커녕 더 거세게 일어날 게 명확하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시계추는 갈수록 진폭이 커지게 마련이다.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개돼지 발언파문으로 불거진 느슨해진 공직기강을 바로잡을 대책 마련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문제나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국 주도권을 잡을 묘책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이 모두 576일 남은 대통령의 시간을 관리할 셈법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실 정치의 시간은 박 대통령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시간을 늘릴 수 없다면 대통령의 시간을 갉아먹는 것을 정리하는 게 최선이다. 지난해 ‘대통령의 시간’이라는 회고록을 출판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박 대통령이 여름휴가 중 한 번쯤 떠올리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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