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국제부장

매년 이맘때가 되면 포츠담 선언에서 히로시마(廣島)·나가사키(長崎) 원폭 투하, 일본제국의 항복과 대한민국의 해방이 있었던 1945년 7∼8월을 생각하게 된다. 당시 한국의 운명은 한국민이 전혀 알지도, 힘을 쓰지도 못하는 가운데 결정되고, 분단으로 이어졌다. 동북아의 한국, 유럽의 폴란드처럼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는 자강(自彊) 정신으로 무장하고 정교한 외교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언제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외교전에서도 산업화·민주화 못지않은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요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박근혜정부 들어 한·미 관계를 희생하고, 한·일 관계를 동결시키면서까지 한·중 관계에 공을 들여왔지만,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 후 물거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가입을 미루고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올랐지만, 겉보기만 화려했을 뿐 내실은 없었다. 박 대통령이 중국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TPP를 통해 미·일 동맹을 격상시키고, 일본의 대외원조 기구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로 바꾸는 전략을 폈다.

광복절을 앞두고 듣기 불편한 얘기지만 한·일 간의 외교력 격차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 해방 직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어깨를 펼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70년간 미국과 일본을 따라잡는 캐치업(catchup) 모델에 입각해 경제를 발전시켜온 덕분이다. 쉽게 말하면 ‘무임승차’다. 미국으로부터는 선진 학문과 이론을 받아들였고, 일본으로부터는 산업기술과 표준화 방식을 도입했다. 일본 여행 때 산업시설이나 공항, 지하철, 철도, 도로표지판 등 사회기간시설이 한국 것과 비슷해 놀랐던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과거사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은 한 수 아래라는 우월감 때문인지 일본 측은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 캐치업’에서 심리적 졸업을 한 것은 이명박정부 때다. 동일본 대지진 뒤 주눅이 든 일본을 향해 이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했고,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의 경제적·외교적 힘이 약해졌기 때문에 일본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를 이유로 정상회담을 거부했다. 한국이 3년여간 한·일 관계를 코마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과 겨룰 만하다는 자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이러는 동안 아베 총리는 미국과 함께 싱가포르, 베트남 등과 TPP 협상을 완결지었다. 박 정부는 TPP냐,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냐를 고민하다 TPP 참여 기회를 놓쳤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중국이 21세기 무역질서를 주도하게 할 수 없다며 TPP를 밀어붙였다.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은 TPP가 아태지역에 미 함대를 하나 더 배치하는 것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미·일 동맹 강화에 이어 대외원조 기구인 일본국제협력기구(JICA)를 혁신해 글로벌 외교 틀을 바꾸고 있다. 지난해 10월 JICA 이사장에 외교전략가인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일본고쿠사이(國際)대 총장이 부임했다. 그는 “일본에 중요한 나라 중심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다”며 아베 총리의 외교노선을 뒷받침하는 대외원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베 총리가 원하는 것은 집단자위권 확대와 안보리 진출이다. 일본이 이렇게 움직일 때 박 정부는 “미·중이 모두 구애하는 축복의 시대”라며 희희낙락했다. 일본이 JICA를 외교전략의 전진 기지로 활용할 때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전파를 얘기하며 한국국제협력단(KOICA)도 그런 식으로 꾸려가고 있다.

박 정부는 현안 위주의 대증(對症) 외교에 치중하고 있지만, 아베 정부는 21세기 생존을 위한 외교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나라를 되찾은 지 71년이 됐지만 외교·안보 전략은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다. 사드 문제는 앞으로 닥칠 동북아 격변의 신호탄에 불과하다. 현재의 외교력으로는 넘기 어렵다. 최고의 전문가들로 드림팀을 다시 짜고, 외교전략도 쇄신해야 한다. 오직 대한민국의 생존과 국익, 백년대계 입장에서 다시 시작하는 ‘리셋’ 작업을 서두를 때다.
이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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