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잖은 지인으로부터 힐러리 클린턴의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듣고 울컥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50여 분간 연설을 수차례 들어봤다. 입소문대로 그는 14세 때 저택 하녀였던 모친에게서 배운 교훈(누구도 혼자 살 순 없다), ‘5개월 권력’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무한 신뢰, 유리천장을 깨겠다는 포부 등을 때론 잔잔하게, 때론 비장하게 풀어나갔다. 연설 곳곳에 배어 있는 이민자를 향한 무한 사랑은 더 인상적이었다. 그는 미국의 신조인 ‘에 플루리부스 우눔’(라틴어로 ‘우리는 하나’)을 되새겼다. 이민자를 미 경제의 은인이라면서 “미국의 힘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다양한 사람을, 가장 관용적이고 관대한 청년을, 가장 혁신적인 기업가를 품는 것”이라고 했다. “이민자를 쫓아내는 건 자멸”이라고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민자 덕을 많이 보는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다. 3D 업종에 뛰어든 이민 청년이 임금과 물가 안정의 주역이다. 미 500대 기업 중 40%가 이민자 창업 회사다. 실리콘밸리 기업의 절반도 그들이 주인이다. 바이오·IT 경쟁력은 인도 출신 고급 두뇌의 산물이다. 체류 외국인이 60만 명에 불과한 중국이 ‘이민청’을 만들려 하고, 배타적 민족주의를 고집하던 일본이 신속한 영주권 승인을 추진 중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클린턴의 연설이 있기 이틀 전, 한국의 ‘후진적’ 이민정책에 경종을 울리는 정부 통계가 발표됐다. ‘국내체류 외국인이 200만 명(총인구 대비 3.9%)을 넘어섰고, 5년 후면 300만 명을 돌파해 ‘이민 대국’ 프랑스와 같은 수준(6%대)이 된다.’ 이 소식을 접한 순간 한국이 온대에서 아열대 기후대로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고 있다가 어느 날 깨우쳤을 때의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이민정책을 돌아봤다. 외국인 노동자가 본격 유입된 지 30년이 흘렀건만 그 시침(時針)은 아직 오전대를 가리킨다. 이민에 대한 통일된 개념도, 통합된 정책도 없다. 국민 눈치 보기에 길든 각 부처는 미봉책만 쏟아낸다. 국회의원에겐 ‘이민’은 금기어다. 잘못 말했다간 정치생명이 끝장난다. 그러니 입법에도 방관적이다.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이 사상 처음 19대 국회에 입성했지만 20대엔 다문화 대표가 단 한 명도 없다.
단일민족끼리 알콩달콩 사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 그건 불가능하다. 어느 나라도 저출산·고령화 ‘괴물’을 피할 순 없다. 이를 잡을 비책도 없다. 늙은 사람의 회춘(回春)이 어려운 이치와도 같다. 정부가 10년간 110조 원을 퍼부었건만 별 무효과인 건 어쩌면 당연하다. 지금 당장 부부들이 아이를 많이 낳은들 효과는 20년 후쯤 나타난다. 이민이 유일한 해법인 이유다.
외국인 수혈이 만병통치는 아니다. 일부 국가가 종교 갈등과 사회 분열, 외국인 테러·범죄로 몸살을 앓는 현실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역사는 노동력 부족과 산업 공동화 등을 부르는 저출산 ‘재앙’을 감당하느니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다양성의 힘’을 빌려 성장률과 내수를 키우는 게 득이 된다는 교훈을 알려준다. 출산율 세계 최저에 잠재성장률도 2%대를 겨우 유지하는 우리도 예외일 순 없다. 이민으로 생기는 생채기는 국민의 지혜를 모아 치유해 나가면 될 일이다.
정부는 올 연말 중장기 이민정책 방향을 잡고, 2년 후 본격 추진하겠다고 했다. 한심하고 갑갑할 뿐이다.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체계적인 이민정책 수립에 나서야 한다. ‘이민청’ 신설도 서둘러야 한다. 불법 이민자에 대한 촘촘한 관리와 대비책 마련도 여기서 총괄해야 한다. 국회도 표심 뒤에 숨어 ‘이민입법’에 침묵해선 안 된다. 국민의 인식 전환도 절실하다. 이민자 수용이 비용이 아니라 국가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점, 이민자들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노동력 보강을 통해 경제를 살려 고용을 창출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세계적 석학인 호세 카사노바 미 조지타운대 교수는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문을 닫고 고립하는 건 경제적 자살행위”라고 했다.
지난 1983년 우리나라 출산율은 2.06명이었다. 사상 처음 인구를 대체할 수준(2.1명) 아래로 떨어졌다. 저출산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저출산 대책은커녕 산아제한 정책을 10여 년간 주야장천 이어가는 ‘망국적 오판(誤判)’을 저질렀다. 이대로 가면 이민정책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게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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