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책은 세계의 어린이들이 평등하게 교감하는 통로다. 글이 적어서 번역이 수월하고 문맹인 어린이도 어느 정도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틀에 갇히지 않은 다양한 색과 형상은 각 지역, 여러 공동체의 특색 있는 문화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의 어린이가 자라면서 느끼는 보편적인 경험과 가치를 담고 있어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게 된다.
책은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작가 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와 마달레나 마토소의 작품으로 라틴 문화권 특유의 선명한 색감과 무늬,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표지는 느긋한 리스본의 해변에서 시작된다. 누워서 몸을 그을리는 피서객들은 저마다 피부색도 다르고 이 중에는 비키니 상의 없이 편안히 엎드린 여성도 있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전부 다 책을 손에 들고 있다. 면지의 기하학적인 타일 무늬에서는 이 지역과 영향을 주고받았던 이슬람 문화권의 모자이크가 떠오르고 위쪽에서 기어오는 빨간 달팽이는 이 책이 앞으로 보여줄 느리지만 아름다운 시간의 서사를 예고한다.
글은 어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사랑할만한 한 편의 시다. 작가는 ‘시간이 흐르면 아이는 자라고 연필은 짧아져’라는 간결한 문장에서 출발해 냄비 속 양파가 부드러워지고 카펫이 닳고 과자가 눅눅해지고 책의 표지가 바래고 타이어가 닳을 때까지 시간의 진행과 함께 달라지는 것들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바뀌는 것 중에는 우리의 감정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촌스럽던 것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멋있던 것이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한다. 그토록 어려웠던 일이 언젠가부터 쉬워지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문득 우리는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이 달라져도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인생은 여행길이며, 줄을 서면 내 차례가 오고, 친구들은 변함없이 내 곁에 있다는 든든한 진리를 말이다. 끝까지 읽고 나면 이 작은 그림책 한 권이 존재와 시간에 관한 철학책 못지않은 여운을 준다.
책의 그림은 글만큼이나 함축적이다. 닳아 없어진 지우개는 가루로만 남아있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나무는 공사 현장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모닥불이 마지막까지 온기를 지니는 것처럼 남아야 할 것은 반드시 우리 곁에 남는다. 책을 덮기 전에 면지의 달팽이는 어디까지 갔는지 꼭 찾아보기 바란다.
김지은 어린이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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