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1970∼1980년대만 해도 세계 반도체시장은 일본 기업의 독무대였다. NEC·도시바·히타치제작소를 필두로 70∼80%를 장악했다. 삼성전자가 1993년 메모리 부문 1위에 오르면서 판도는 뒤집혔다. 엘피다는 ‘삼성 타도’에 나선 일본 반도체 연합군이다. 1999년 NEC와 히타치가 손잡았고, 2003년엔 미쓰비시가 가세한 메모리 반도체 회사다. 당시 일본 언론은 ‘히노마루(日の丸·일장기) 반도체’라며 거국적 응원을 보냈다. 엘피다는 희망을 뜻하는 그리스어 ‘엘피스’에서 따왔다. 이름이 무색하게 2012년 파산하면서 미국 마이크론에 넘어갔다. 각사 기술인력은 현장에서 화합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현재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합친 D램 시장점유율은 75%다.

2012년에는 디스플레이 쪽에서 비슷한 일이 진행됐다. 소니·히타치·도시바 3사는 합작사 ‘재팬디스플레이(JDI)’를 출범시켰다. 한때 TV·LCD에서 앞서갔던 일본 전자업체들은 디스플레이에서도 한국의 삼성·LG에 선두 자리를 내주고 만다. 3사의 중소형 LCD사업을 합친 JDI는 한국의 아성에 도전하는 일본 연합군이지만, 아직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합류 제의를 뿌리치고 독자노선을 걸었던 ‘액정의 샤프’는 올해 초 대만의 훙하이(鴻海)그룹에 팔리는 신세가 됐다.

일본 기업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가도 국익이란 명분 앞에서는 종종 한배를 탄다. 특히 시장 주도권을 뺏겼을 때 그런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어려운 처지의 기업끼리 합쳐 성공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많지 않다. 그래도 히노마루 연합군의 등장은 계속된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일본 1위 조선업체 이마바리조선, 3∼4위인 오시마·나무라조선과 사업 제휴에 나섰다. 4개사의 선박 건조량을 합치면 세계 1위 현대중공업에 이어 2위 규모가 된다. 훙하이 품에 들어간 샤프는 지난주 JDI를 향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분야에서 협력하자고 제의했다. 다이정우 샤프 사장은 “한국과 경쟁할 히노마루 연합”이라고 그 성격을 분명히 했다.

산업 전반으로 확산 중인 히노마루 연합군의 뒤엔 일본 정부가 있다. 아베 정부는 2009년 민관 합작회사 ‘산업혁신기구’를 설립해 JDI 등의 통합작업에 개입해왔다. 산업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한국과 달리 민·관이 똘똘 뭉쳐 전의를 다지는 모습은 과거와 달리 위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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